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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Jul 08. 2021

다시 보게 되는 지정학의 존재감

대니얼 예긴의 『THE NEW MAP(뉴 맵)』이 주는 메시지

  여러분은 '지정학'이라는 단어를 보거나 들었을 때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 자체를 몰랐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단어 자체는 접해 본 적이 있지만 그 내용에 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지리학(Geography)과 정치학(Politics)이 합쳐진 형태를 하고 있는 지정학(Geopolitics)은, 사실 어원과는 달리 지리·정치만 다루지는 않는다. 지정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각지의 역사를 알아야 하며, 경제학적인 접근 역시 빠지지 않는다. 국제 외교를 포괄하기 때문에 군사학적인 요소도 함께 고려되고, 중요한 에너지 자원을 늘 염두에 두고 분석을 하므로 지질학적인 접근이 요구되기도 한다. 간학문적인 관점이 중요시되는 시대에서, 지정학은 간학문 분야의 최고봉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광범위한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굉장히 많은 분야를 넘나들면서 사유하는 능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다 보니, 접근성이 그렇게 좋은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학문을 하나만 파고들어도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혀서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지만, 지정학에 발을 들이면 하나의 이슈에도 몇 가지나 되는 관점에서의 분석을 할 줄 알아야 하니 끈기 있게 공부를 하려는 의지가 계속 시험대 위에 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쓴이는 지정학적 분석 능력을 가지는 것은 현대인에게 엄청난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로벌 이슈에 관한 뉴스 하나를 보더라도, 지정학적인 사유 능력의 깊이에 따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차이가 크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뉴스에서 한 번쯤은 접해 봤을 법한 '미국의 셰일 오일 혁명' 같은 기사를 예시로 생각해 보자. 지정학적인 배경 지식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사람은 뉴스의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온 순간, 원자재와 에너지에 대한 미국의 대외 의존도가 줄어듦에 따라 외교 노선이 자국 중심주의 방향으로 좀더 가까워질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지정학적 판단 능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의 사고 범위는 헤드라인의 텍스트 이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석유까지 나오고 참 좋겠네' 정도에서 사고 회로가 멈춰버리는 것이다. 별것 아닌 차이 같아 보이지만, 사고 회로가 광범위하게 활성화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교양 격차는 매일 쉴새없이 벌어진다. 어느 순간부터는 후자가 전자의 교양을 전혀 따라갈 수 없어 대화 레벨이 맞지 않을 정도가 되어버릴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세상 흐름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할수록,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보려는 사람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평의 확장을 갈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귀중한 존재 중 하나가 바로 대니얼 예긴의 저서 『THE NEW MAP(뉴 맵)』이다. 대부분의 이들에게, 현대 지정학의 광대한 파노라마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들부터 시작하여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들까지 이어진다.


  2018년 가을,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이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40여 년만에 세계 최대의 석유 생산국 자리를 되찾은 것이다.
(『THE NEW MAP』, 리더스북, p.109)

  

 미국이 세계 제일의 석유 생산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셰일 혁명으로 인해 그동안 캐낼 수 없었던 퇴적암 지층 속 원유와 천연가스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술의 의의는 단순히 생산 가능한 에너지의 양이 늘어났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랫동안 미국의 근심거리였던 불안한 석유 수급 문제에 대한 돌파구가 보이면서, 미국은 그간 늘상 신경써 왔던 중동 정세의 불확실성으로부터 한 걸음 멀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셰일 오일 생산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 수익 분기점이 비교적 높다는 한계점은 있지만, 그마저도 날로 발전하는 기술의 덕을 보며 생산 부담을 꾸준히 줄여가고 있다.

  

  퍼미언 분지와 이글 포드 지역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셰일 오일 산지들의 막대한 원유 매장량에 힘입어 미국은 이미 원유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생산하고 있고, 심지어 초과 생산분을 타국으로 수출하며 천문학적인 경제적 효과를 누리고 있다. 예전처럼 이라크의 불안한 정세로 인해 미군이 출정 준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안정적인 석유 확보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안보 안정이라는 양측의 이해관계 맞아떨어진 공고한 양국 관계 역시 앞으로도 과거의 끈끈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미국이 중동에 행사하는 영향력을 줄인다면, 수니파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의 맹주 이란 사이의 파열음이 얼마나 커지게 될지 예상하기 어렵다.


  '미국의 셰일 혁명'이라는 기사의 소재 하나로 미국의 정치경제적인 움직임과 그에 따른 타 지역의 가까운 미래까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지 않은가? 지정학적 통찰력을 가진 예긴의 눈으로 세상 다른 곳을 둘러다 보아도 동일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유럽연합 전체의 에너지 소비량에서 천연가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25퍼센트 정도다. 다시 말해 유럽 전체 천연가스 소비량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러시아 천연가스는 결국 유럽 전체 에너지 소비량의 10퍼센트를 책임지고 있다는 뜻이다.
(위의 책, p.141)

 

 러시아가 유럽에서 외교적으로 수세에 몰렸을 때 흔히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이 바로 '가스관 차단'이다.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해 높은 천연가스 소비 비중을 유지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에게 천연가스 공급 차단은 경제 전방위적으로 치명적인 데미지를 가할 수 있는 위협적인 무기이다. 하지만 시장 경제라는 무대에서 한 쪽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면 결국 그에게도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화살이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러시아가 가스관 차단을 앞세워 유럽 국가들을 압박해도, 그만큼 가스 수출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자원 수출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은 러시아는 버틸 재간이 없다.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국가들은 자국의 국제적 역량을 유지하기 위해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해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사사건건 최강국인 미국과 대립하는 러시아가 국제 무대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당당히 내려면 경제적 안정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국의 든든한 우방이 되어줄 파트너로 중국을 선택했다. 시베리아를 거쳐 중국으로 향하는 가스관이 새로 부설되었고, 중국은 러시아의 러브콜에 몇십 년간의 이용 대금을 선금으로 한 번에 지불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로써 러시아가 인구가 13억을 상회하는 엄청난 규모의 시장을 확보함으로써 천연가스 수출 폭을 크게 넓혔고, 시베리아에서 인접하는 중국이 우군이 되어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선을 가진 군사적 취약성을 보완했다. 세계 최대의 자원 소비국 중국 역시 러시아의 자원을 확보하여 동중국해를 통한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게 됐다.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미묘한 줄다리기에서 파생된 연결 고리를 따라가 보면, 중국의 대외 전략까지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독자들이 현재 동중국해에서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연대하고 있는 미국)이 어떤 마찰을 일으키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EU부터 중국에 달하는 유라시아 전체의 정세 분석까지도 단번에 해낼 수 있다.

  이토록 놀라운 지정학의 돋보기로, 높은 상호 연계성을 보여주는 국제 현안의 포커스를 중동으로 살짝 옮겨 보자.



2200만 명의 시리아 국민 중 내전으로 사망한 사람은 50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600만 명 이상이 국내를 떠돌고 500만 명 이상이 해외로 탈출해 난민이 되었는데, 이 모두를 합치면 시리아 인구의 절반 이상이며 그 영향은 중동 지역 바깥으로도 퍼져나갔다.
(위의 책, 리더스북, p.354, 356)

   

전쟁은 많은 이들에게 광범위한 피해를 입히고, 수많은 가치를 파괴해 버린다. 특히 자국이 전장이 되면 국토가 황폐화하고 기반 시설이 망가져 전시뿐 아니라 전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현대의 강대국들은 자국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지는 것을 최대한 피한다. 최악의 시나리오인 전쟁으로 빠져도 제3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에 개입해 자국이 입을 데미지를 최소화하고, 상대 진영을 제압해 전후 판도에서 우위에 서고자 하는 것이다. 시리아와 예멘의 내전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독재 정권이 지키고 있던 시리아에서 '아랍의 봄'의 물결에 힘입어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 유혈 사태를 일으켰고, 이러한 혼란상을 틈타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 IS가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내전에 가담했다. 아군 시아파 정권의 붕괴를 원치 않는 이란이 시리아 정부군 측에 힘을 보탰고, 시리아가 사회주의 국가이던 시절부터 우호적 관계에 있던 러시아도 중동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군을 도왔다. 한편 터키가 반정부 성향의 쿠르드족(시리아-터키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을 정리하기 위해 전선에 참여했고, 이란의 세력 확대를 원치 않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시리아 정부를 공격하는 IS의 준동을 눈감아주며 시리아 전체가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예멘 내전 역시 정부군과 후티 반군의 대결로 시작됐으나, 후티가 집권하면 남북으로 시아파 국가를 마주해야 하는 부담을 감내하고 싶지 않았던 사우디아라비아가 개입하며 전쟁 규모가 커져버렸다. 시아파 진영 확대를 위해 이란이 후티를 막후에서 지원하며 반군도 한 나라의 정부군에 크게 밀리지 않는 화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양측의 싸움이 지리멸렬하게 계속되어 결국 예멘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다.


  내전의 기간이 길어진 데다, 여러 국가들이 자국의 영향력 및 이권 확대를 위해 뛰어들면서 전쟁 규모도 시리아와 예멘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기반, 수많은 국민들의 생명을 잃어버린 양국은 이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라 세계 지도 위에서 이름만 덩그러니 존재하는 국가로 전락했다. 수없이 서로 얽히는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의 거대한 위력이 두 나라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갔다.

  

  지정학적 연결고리의 파괴력이 이렇게나 큰 만큼,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해서도 지정학적인 이해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뉴스 헤드라인을 넘어서 나름대로 현상에 대한 해석과 미래에 대한 예상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지정학의 힘이다. 이것만으로 전문가들의 통찰의 진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책 단 한 권만으로 우리의 식견을 얼마나 함양할 수 있는지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 통신 기술의 놀라운 발달로, 현대 사회는 초연결성을 띠고 있다. 전세계를 지배하는 초연결성은,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난 혁신이 다른 지역의 발전을 이끌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 곳에서 일어난 국지적 분쟁이 다국적군의 무대가 되는 난전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세상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로부터의 인과관계뿐 아니라,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일어난 사건의 파급력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야흐로 지정학이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는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매일 꾸준히 뉴스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교양 수준은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각각의 뉴스는 글로벌 이슈의 편린에 불과해, 대대적인 정리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인과관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데이터 덩어리들의 상호 관계를 파악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놓아두면 그들 자체만으로는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머릿속에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짧은 지식들을 이을 수 있게 하는 양서가 굉장히 소중하다. 지정학의 생명은 연결성으로부터 나오며, 정보들의 링크가 걸려 의미 구성이 진행되는 순간부터 뇌내의 정보들이 막강한 시너지를 발휘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사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싶어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무형의 가치를 알고 있고, 어디까지 볼 수 있는가에 따라 때로 우리의 삶의 방향성이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지정학적 통찰력을 가지고 싶은 의향이 있고 그것을 행동으로 치환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내공을 쌓기 위해 긴 시간 동안 연구와 조사를 거듭해 온 대니얼 예긴의 지적 역량이 농축돼 있는 결과물을 톺아 보는 것이 어떨까. 약 600페이지라는 양이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겠으나, 그곳에 녹아 들어 있는 전문적 해설을 둘러본다면 독서에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정학적 소양을 쌓아가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의 시야에 펼쳐지는 세계가 넓어져 감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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