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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Jul 08. 2021

글을 쓰는 이유를 되새기며

호리에 타카후미의 『가진 돈은 몽땅 써라』를 읽으면서

  글쓴이는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아들에게 게임기와 핸드폰을 사줄 돈으로 소설 장편 명작선, 그림이 담긴 과학 책 시리즈를 구매해서 집을 온통 가득 찬 책장으로 메워버렸던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읽은 책들로부터 얻은 지식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책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습관이 생겨났다.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머리에 담아두려고 노력한 산물이 누적되어 가며 제법 긴 글도 쓸 수 있는 스킬도 얻었다. 과거와 비교해서 아는 것이 많아져서 쓸 만한 것이 많아질 때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성취감을 느꼈고,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글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한 가지 일에 오랫동안 집중할 수 있고, 여러 경로를 통해 머리에 차곡차곡 쌓아둔 내용을 자신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펼쳐 가면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끌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주위로부터 끊임없이 주입되는 '좋은 학교'의 '좋은 학과(문과 기준으로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의 상경계열 학과)' 입학에 대한 기대감은 늘 심리적인 중압감으로 작용했다. 턱없이 부족했던 자존감으로 인해 꿈에 대한 자신감마저도 제대로 품을 수 없었다. 그렇게 글쓴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가지게 된 삶의 목표를 접고 현실과 타협했다. 눈앞에 계속 닥쳐 오는 내신 시험과 대입을 판가름하는 수능 시험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자신감과 열망에 결합하지 못한 꿈은 거센 바닷바람을 맞은 성냥불 같이 허무하게 스러져 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음이 향하는 꿈의 가치를 알지 못했고, '성공적인 대입'이라는 명분 앞에 작가의 꿈은 '희생되어도 괜찮은 것'이란 낙인이 찍힌 채로 삶의 구석 어딘가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어딘지도 모를 정도로 후미진 곳에 유배를 보내버렸던 꿈을, 부끄럽게도 다시 스스로 찾아나서게 될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성향에 맞지 않는 전공 공부와 생각과는 너무 달랐던 캠퍼스 라이프에 실망한 신입생은 우왕좌왕하다가 대학 입학 후 첫 2년을 떠나보냈고, 부모님의 권유에 못 이겨 준비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바람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궤도에 올라타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샌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며 삶이라는 대양(大洋)에서 그저 표류하듯이 하루 하루 일상을 버티면서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막심한 후회감 속에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조적인 냉소가 되풀이되는 괴로움 속에서, 글쓴이는 마침내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올 실마리를 찾았다. '나는 왜 살아가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라는, 삶의 가장 깊고 근본적인 질문에 이른 끝에, 5년 전 포기했던 희망을 다시 좇아 뛰어야겠다는 확신이 든 것이다.


  물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망연한 자문(自問)만이 글쓴이를 새로이 일깨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좋은 학교에까지 들어가 놓고 아깝지 않느냐"라는 모두의 한 마디도 자극으로 작용했지만, 그것은 "더 높은 지위에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와 동일한 말이었을 뿐 진심으로 듣는 이의 심정을 고려한 말은 아니었다. 다소 늦은 감도 있지만 다시 한 번 전력으로 달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 것은, 이웃 나라에 사는 어느 한 사업가가 책에 담은 메시지였다.


  일본의 유명한 사업가 중 한 명인 호리에 타카후미는 여러 분야에 걸쳐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일궈가고 있는 인물이다. 삶에 대한 도전 정신이 일관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글쓴이는 내심 자신의 삶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을 때 돈에 연연하지 말고 도전하라'라는 확신에 찬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호리에와, 그동안 몇 번이고 자신을 속이며 뒤늦게 현실에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예전에 이것저것 해 둘걸'이라는 사후적인 평가만 늘어놓았던 본인이 너무나도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가감없이 감상을 늘어놓자면, 부끄러움보다도 수치가 느껴진 것에 가깝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서 나는 가고 싶은 길에 발도 내딛지 못했는가. 비겁하게 스스로 꿈을 던져버리고 다른 길을 가서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 왜 지금부터라도 무언가를 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가. 자아비판적인 자문이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솟구쳐 올랐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강도 높은 질문들이 뇌 속을 헤집고 지나갔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독서를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글쓴이가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던 이야기를 자신의 형식으로 바다 건너편의 독자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렇게 침묵하고 있던 '내가 바라는 삶'에 대한 열정의 불을 다시 피워줬다.



  리스크 따위 내팽겨치고 3살배기 아이처럼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폭발시켜서 하고 싶은 일에 미쳐라.
(『가진 돈은 몽땅 써라』(쌤앤파커스, p.28)
사람은 항상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야 한다.'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디에 가고 싶은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이를 위해 필요한 실천을 대담하게 반복해가야 비로소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위의 책, p.32)


  챕터를 정리하는 모든 문장이 뇌 속으로 스며들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도전을 주저하면서 마음속에 누적되었던 불편함의 크기만큼, 새롭게 찾아나선 꿈에 대한 열망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부풀어 갔다. 비록 현실은 20대 중반의 공무원이지만, 직장에 매여 있다는 머릿속의 족쇄를 벗어던지자 그 안에는 초등학생만큼이나 순수하게 열망으로 부풀어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책을 절반도 읽지 않은 시점에서부터, 글쓴이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제약할 만한 것은 모조리 갖다 버렸다.


  10년 전에도, 5~6년 전에도 꿈은 있었다. 다만 그 꿈을 향해 전력질주할 만한 동기를 제대로 부여하지 못했고, 꿈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지쳐 쓰러지지 않고 확신을 가진 채로 레이스를 완주할 만한 정신적인 힘이 모자랐다. 그래서 꿈나무는 싹을 제대로 틔워보기도 전에 무참히 잘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싹을 잘라버리며 한없이 무력함과 비참함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수없이 자기합리화를 했던 슬픈 과거가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 씨앗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과거와 같지만, 이젠 비바람이 닥치더라도 연약한 싹을 지켜 어떻게든 나무로 키워 보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이 씨앗이 자라서 어떤 나무가 될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다. 그래도 꾸준히 물을 주며 양분을 공급해주면, 언젠가는 여러 명이 몸을 뉘이며 쉬어갈 수 있을 정도로 품이 넉넉한 믿음직스러운 아름드리나무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이웃집이 정원에서 이미 키가 1m는 되어 보이는 나무를 키우고 있다고 해서 시작이 늦었다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씨앗을 언젠가 나무로 만들게 할 공력이다.


  새삼스럽게 삶에서 도전의 의미를 깨닫고 있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세상 속 대부분의 이들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일상에서 열정과 보람이 결여된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간헐적으로 자신을 덮쳐오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나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한 것일까'라는 괴로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채로 떠나보내는 날이 늘어갈수록, 이겨내기 힘들 정도로 회한도 커져 버리고 말 것이다. 글쓴이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자문에 대한 답을 회피한 채로 꽤나 긴 시간을 보내 왔다.


  그러나 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띄어 결국 집까지 동행하게 된 책 한 권은, 결국 삶에서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었다. 1주일에 이틀밖에 안 되는 주말을 맞이하여 자유롭게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를 갈망하면서 5일을 꾸역꾸역 버티면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통스럽게 고뇌하던 청년이, 그 5일을 어떻게 보람 있게 채워나갈지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해 주었다. 호리에의 말처럼, 꿈에 따르는 리스크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인생에서 어느 길을 가든 짊어져야 할 리스크라면,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 짐지고 걸어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독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글은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의 집합체라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100%의 확신으로 떳떳하게 위 문단의 말을 다른 이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당장 자신의 삶에 확신이 없고, 자신도 언젠가 진심으로 품었던 꿈을 접은 채 걷고 싶지도 않았던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떻게 당당하게 도전적인 인생 철학을 논할 수 있겠는가.


  글쓴이 역시 새로운 영역의 삶으로 첫 발을 내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당당히 인생 지론을 전달하고 삶의 새로운 희망을 쥐어줄 자신은 없다.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두려움에 첫 발조차 떼지 못한 사람들과 나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나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 호리에의 말을 빌려, 여러분들도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보람이 있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행동하고 바보 취급당하는 것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용기 내어 계속 도전하는 것이 왜 바보 취급당할 일인가? 조금만 용기 내어 시도하다 보면 결국 성공할 수 있는데, 기회를 빤히 놓치고서는 성공한 사람을 질투하고 부러워하는 것이 몇 배는 부끄러운 일이다.
(위의 책,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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