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껏 어떤 이유로든 '빠르네'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어렸을 적에 또래보다 성향이 정적이었고, 나가서 뛰놀고 싶어도 학원에 갇혀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터라 속도감을 단련할 일이 거의 없었던 탓이 컸다. 속도를 높여 하는 일이라고는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문제를 푸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생 시절부터 스피드라는 개념이 갖가지 형태로 항상 어린아이의 발목을 잡았다.
가뜩이나 재능도 없었던 운동신경은 기본적인 자극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아 능력이 제로 수준에서 머물러 있었다. 또래와 친해지기 위한 필수 과정에 가까운 축구를 할 때면, 생각 이상으로 잘 움직이지 않는 몸에 자괴감을 느끼곤 했다. 굼뜬 것은 손놀림도 마찬가지여서, 실과 시간에 바느질 같은 과제가 주어지면 항상 정규 수업시간을 초과해 마지막까지 교실에 남아 있는 처지가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느리다는 자각과 좀처럼 변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커가면서 스피드에 대한 갈망과 강박으로 이어졌다. '나는 뭘 하든 느리다'라는 강박과 주위의 인식을 깨야 한다는 압박이 여러 가지 형태의 집착으로 나타났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시간이 날 때마다 사람이 없는 샛길에서 전력으로 달리는 연습을 했고, 공부를 할 때도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시간을 얼마든지 쓰는 예전의 방식을 버려 맞힐 수 있는 문제를 최대한 맞히는 방식으로 현실과 타협을 하기 시작했다.
습관을 바꾸니 성장의 형태와 궤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에서 벗어나 5년이 지났을 무렵, 초등학생 시절의 자신과 공통분모가 너무도 없는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워낙 밖에 나가질 않아 유독 하얬던 피부가 달리기와 축구를 연습하면서 차츰 운동장의 모래 색깔을 닮아갔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경시대회에서 성적이 좀처럼 오르지 않았던 수학보다 또래에 비해 확실히 뒤처져 있던 영어와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체형도 많이 슬림해져 있었고, 그 덕에 몸놀림이 많이 날렵해져 어느새 평균을 웃도는 수준으로 빠르게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땀 흘리기조차 싫어했던 10살 시절과 달리, 체육 시간에 축구와 배드민턴을 하는 것이 스트레스 배출구가 되어 있었다. 이 무렵 배우기 시작한 기타도 악보가 예상보다 빠르게 외워져 금세 흥미를 붙였다.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곳에 가능성이 존재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예전에 생각한 미래의 자신의 모습과, 그 미래에 도착한 시점에서 자신의 모습은 점점 큰 차이를 보였다.
변신에 성공했음에도 느림의 유전자까지 바꾸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부터였다. 서울에 처음으로 살게 되어 낯선 환경에서 지내기 시작했다는 점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폭넓게 사람을 사귀고 여러 곳을 누비는 성향으로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음악 동아리에 가입한 뒤로 생긴 제한적인 범위 이상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또래 친구들이 곳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뒤늦게야 알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학교에 퍼진 소문을 친구들보다 늦게 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심지어 취업을 위해 대학생들이 참가할 수 있는 수많은 프로그램의 존재도 한두 학기가 지나서야 알게 되는 일이 흔했다. '느리다'라는 말이 다시금 그림자에 따라붙어 있었던 것을 몰랐던 죄로, 생각지도 않던 시험을 보고 공무원 노선을 타게 되는 스노우볼 효과가 인생에 찾아오기까지 했다.
대학에 몸을 담고 나서야 무엇이든 빨리빨리를 강조하는 대한민국에서 느리게 사는 사람이 거대한 압박에 시달릴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를 빠르게 알아차리고, 빠르게 무엇이든 숙련해야 자신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무거운 마음의 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취업 문제로 고민인 선후배들과 또래 친구들이 고민을 토로할 때마다, 그 고충에 섞인 한숨의 농도와 짐의 무게가 비례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느린 사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으로서, 빠른 사회에 발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숙명에 놓인 술자리 상대를 위로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절감한 바가 있다. 인생의 궤도가 다른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기발한 한 마디를 제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순발력과 창의력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느림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적인 수고로움을 감내해 보려 했지만, 삶에 관성이 추가됨으로 인해 학창 시절보다 더 높아진 가속화 미션의 허들은 번번이 주자를 좌절시켰다.
지금은 느린 자신을 획기적으로 바꾸고자 할 용의가 크게 없다. 오히려 세상보다 자신의 템포가 많이 늦다는 것을 일상에서 이따금 실감할 때마다 놀라곤 한다. 유명 전자기기 업체에서 신상 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또래 친구들이 손에 드는 핸드폰과 노트북의 종류가 많이 바뀌는 것을 목격하지만, 이쪽의 핸드폰과 노트북은 항상 5년 이상은 함께 지낸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꽤 오래전부터 카드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 결제 수단이 핸드폰 안으로 들어가면서 카드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절친들로부터도 불편하게 지갑을 왜 들고 다니느냐 하는 말을 몇 번이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늘 손에 들고 다니는 핸드폰이 처음 결제 기능을 수행한 것은 어제였다. 두툼한 지갑에 카드를 몇 개씩 들고 다니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있으면서도 누구보다도 늦게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었다.
느린 사람이라는 본질이 확실히 짙게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린 시절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손으로 무언가를 다루는 일은 남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동년배들보다 변화에 적응하는 속도도 느리며, 심지어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새롭게 찾아 나선 시점도 늦었다. 어쩌면 내면에 잠재된 느림의 속성 중 25년이 다 되도록 발견되지 않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속도의 족쇄가 스스로를 옭아매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으려 한다. 어릴 적에는 느린 자신이 늘 손해를 본다고만 생각했고, 경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특성을 제거해 버리려고 갖은 애를 썼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 남아 있었고,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이 합쳐져 새로운 자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지금의 삶에 여러 가지 아쉬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위 구절은 공허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느린 사람의 눈으로 봐도, 세상살이는 속도와 방향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길을 간다면 당연히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인생의 정답이 어느 쪽인지 알지 못한다. 과정과 결과는 사후적인 관점에서 판단되기 마련이며, 어느 길을 가든 그에 따른 후회가 따라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느린 사람은 빠른 사람에 비해 다양한 디메리트를 떠안고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자신을 가속하기 위해 스스로에 채찍질을 가하지 않으려 한다. 느리게라도 확실히 납득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할 시점에 서 있으며, 이제부터는 길을 선택하기보다 선택한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삶의 곁으로 돌아오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인생의 숙명적인 파트너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에서조차 느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명하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자책 대신 미래에 대한 의지가 더욱 필요하단 것은 분명하다. 늦게나마 그리기 시작한 마음속의 종착역과 지금의 위치 사이에 길을 닦아 나가기 위해, 다시금 느리고 긴 여정을 견딜 용기와 각오를 다져야 할 때임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