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독은 어떻게 패턴이 되었는가
두 번째 페이지로 이어지는 닉의 고백.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졌지만, 그런 나조차도 선이라는 건 있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이 흐름으로 이어지는 문장이다. 몇 개의 번역문들을 읽어보자.
• 케이스 A
• 케이스 B
• 케이스 C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 잘 이해되는가? 우선
1. 인간의 행동
2. 단단한 바위 or 축축한 습지
3. 상관하지 않는다.
이 세 포인트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게 쓰여졌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신경 쓰지 않는다’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무슨 의도인지 애매하다.
Conduct may be founded on the hard rock or the wet marshes but after a certain point I don’t care what it’s founded on.
사람의 행동에는 저마다의 배경이 있기 마련이고 그 배경은 단단한 암반일 수도, 질퍽한 늪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도를 넘어 버리면, 나 역시 그런 배경을 더 이상 고려하지 않는다.
먼저 퀴즈
1. 위 문장의 after at a certain point와 같은 뉘앙스를 고르시오.
a. 고비만 넘기면 괜찮아.
b. 도가 너무 지나치면 말려야지.
c. 지켜보다가 어느 정도 시간 지나면 불 줄여.
2. 위 문장의 I don’t care와 같은 뉘앙스를 고르시오.
a. 나는 너의 배경을 상관하지 않아. 사랑하니까.
b. 알바임?
c. 나는 아무거나. (정답은 잠시 후)
해설
1. Conduct may be founded
(사람의) 행동의 근간이라는 것이
2. on the hard rock or the wet marshes
단단한 암반일 수도, 혹은 축축한 늪지일 수도 있다. (다양한 배경을 감안하려고 한다)
3. but after a certain point
하지만 어떤 선을 넘으면 (한계)
4. I don’t care
고려하지 않는다
5. what it’s founded on.
그 근간(배경, 환경)이라는 것을.
즉, 이 문장의 진짜 의미
‘사람의 어떤 행동이 나오는 배경에는 살아온 과정이라는 게 있으니, 저마다의 그 배경을 감안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면 관용 없다, 사정, 배경 따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위 퀴즈의 답은 둘 다 2번이다. 이 문장 번역의 포인트는 바로 after a certain point와 I don’t care의 뉘앙스를 잡아냈는가, 에 있다.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일상 표현으로 다시 구성해 보면, ‘나도 열받으면, ㅆㅂ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게 뭐야, 이렇게 된다’라는 의미다. 단, 피츠제럴드와 닉의 ‘언어’는 ㅆㅂ과 같은 언어여서는 안 된다. 태도를 확실하게 이해한 후 화자의 목소리에 맞는 어휘를 선택하는 것이 번역가의 미션이다. 전달이 잘 되는지 보자. ‘인내의 한계(닉의 인간적인 면)’.
• 김 ㅇㅇ 번역 (ㅁ 출판사, 2003년)
• 김 ㅇㅇ 번역 (ㅇ 출판사, 2013년)
• 김ㅇㅇ 번역 (ㅁ 출판사, 2009년)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번역자가 ‘나는 배경 따윈 상관하지 않는 쿨한 사람’으로 ‘들리게’ 옮겼다.
I don’t care = 상관하지 않는다 사전 들고 따지자면 잘못 옮긴 건 없다. 그러나 오리지널 텍스트의 의도가 뭉개졌다. after a certain point = 일정 지점을 지나면, 일정 단계가 지나면 도 마찬가지. 사전적으로 오역이 아님에도, 심하게 말하면 ‘뭐라는지 모르겠다’가 돼버렸다.
• 유 ㅇㅇ 번역 (ㅌ 출판사, 2003년)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에서 방향을 잡은 듯 하나 ‘상관하지 않는다’로 다시 모호해졌다. 원문의 의도는 신경 쓰지 않는 ’ 무심함‘이 아니라, 배려 접겠다는 ‘의지’이기 때문. ‘뿌리를 내린다 ‘도 의미가 어긋난다. 행동이 뿌리에서 비롯된다면 모를까, 행동이 뿌리를 내린다는 건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
• 한 ㅇㅇ 번역 (ㅇ 출판사, 2011년)
닉의 개인적 고백에 세상 사람들은 왜 소환했는지 이해 불가. 의미가 붕괴된 케이스.
또 하나
hard rock, wet marshes는 ‘사람들의 다양한 배경’을 말하는 은유. 그러므로 founded를 ‘기초, 토대, 근간’과 같은 물리적 표현에 집착하면, 은유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않게 되는 걸,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번역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 황 ㅇㅇ 번역 (ㅎ 출판사, 2025년)
이쯤 되면 번역자들이 하나같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확실해진다. 바로 이전 문장에서 ‘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라고 말의 서두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연결된 얘기임을 파악하지 못한 듯하다.
무슨 소리냐면
And, after boasting this way of my tolerance, I come to the admission that it has a limit. / Conduct may be founded on the hard rock or the wet marshes but after a certain point I don’t care what it’s founded on.
추측컨대 ‘And, after boasting this way of my tolerance, I come to the admission that it has a limit. 이렇게 나의 관용을 자랑했으니 이제 그 관용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겠다.’ 이 문장으로 인내심 얘기는 끝내고 다음 얘기로 넘어간 걸로, 즉 Conduct라는 개념적 단어가 문장 앞에 나오니 ‘철학적 명제/선언’ 같은 문장인 걸로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이전 문장에 대한 ’부연 설명‘인데도.
• 황 ㅇㅇ번역 (ㄷ 출판사, 2018년)
유일하게 제대로 옮겼다. 아쉬운 점은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다’가 다소 뜬금없다. 자연스러우려면 ‘…. 질퍽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다’라고 했으면, 거기에 ‘단계에 이르면’ 보다 ‘넘어버리면’으로 다듬어 임계점 뉘앙스를 확실하게 했으면 좋았을 것. 유일하게 진짜 의미를 캐치했다. 같은 ‘상관하지 않는다’인데도 모호함이 사라졌다.
의미상 가장 무난한 번역인데, 다른 예시문에서도 Nick의 나레이션에 ’욱 하는 성깔‘ 을 계속 넣는 것이, 톤 면에서는 아쉽다.
• 김 ㅇㅇ 번역 (ㅂ 출판사, 2020년)
‘마련이다’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전 문장에서 이어지는 부연설명이 아니라 불현듯 등장한 ‘철학적 명제/선언’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오독한 문장으로 만든 형태 좋은 문장.
* 번역가들이 원문톤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마련이다’를 만능키/안전판처럼 쓰는 걸 종종 보게 된다.
• 최 ㅇㅇ 번역 (ㅇ 출판사, 2013년)
‘도덕적 행위’로 시작하는 것에서 역시 문장을 오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이라는 표현은 ‘불현듯’, ‘나도 모르게’, ‘아무 이유 없이’로 읽힌다.
최대한 많은 버전을 실례로 들어 설명한 이유는, 번역의 문제가 오역 그 자체에 있지 않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오역의 연쇄효과로, 모양은 그럴듯하지만 난해한/억지스러운 문장이 만들어져 문장 간 논리의 링크가 뚝 끊겨버리는 것이 문제다. ‘고전은 난해한 법’이라는 오해를 낳는다. 번역가는 ‘내용의 억지’를 문장 형태만 그럴듯하게 꾸밀 게 아니라, 그 ‘억지’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
- 3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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