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 6

오독은 어떻게 패턴이 되었는가

by Yejinsoul


앞선 1~5편에서 38종 번역본의 서두를 살펴본 결과, 모든 번역에서 빠져있는 중대한 것을 깨달았다. 오역, 문맥 파악/뉘앙스 캐치 실패… 이 모든 것을 정리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화자 닉이 서술하는 모든 걸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자조적인 뉴잉글랜드맨 식의 유머가, 더 나아가 닉의 ‘목소리’가 작품 전체에 통째로 빠져있다. 문장이 유려하고 조잡하고 상관없이.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가장 ‘가독성이 좋은‘ 번역본을 예로 들어보려 한다. 한 번역가에 대해 논하고자 함이 아니라, 모든 번역서가 가지고 있는 대동소이한 문제를 얘기하기 위해 ‘현대적 문체‘를 가져왔다.




(*도서판매 사이트의 미리 보기 4 페이지 발췌))












tone shift(어조 변화) 설명




이 문장 전까지는 셀프비하 유머가 깔린 톤.


‘이런저런 야심 찬 계획들. 이 책도 읽고 저 책도 읽고 두루두루 다양한 분야를 아는 사람이 돼야지 계획은 창대했다.’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진심의 열망이 아니라, ’계획을 위한 계획‘ 느낌. 응당 배운 사람라면, 증권맨이라면, 이런 목표가 있어야지, 셀프 풍자 톤.


(이미 그 톤을 파악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농담기를 쏙 빼고 tone shift, 어조의 변화가 일어난다.




This isn’t just an epigram-life is much more successfully looked at from a single window, after all.




This isn’t just an epigram-

멋있는 경구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에 하는 얘기다.


life is much more successfully looked at from a single window, after all.

사실은, 인생은 한 개의 창을 통해 바라볼 때 더 잘 보이는 법이다.





즉, 다방면에 박학다식? 사실 그거 썩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 라는 고백이자, perspective 관점에 대해 말하는 문장이다. 닉이라는 하나의 창을 통해 바라본 개츠비, 닉을 통해 바라본 Roaring 20’s 아메리카에 대한 이야기라는 암시이자 소설의 구조를 각인시키는 중요한 문장인 것이다.




그런 톤의 변화를 캐치하지 못해 문장 간 사고의 흐름이 뚝 끊긴 단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 문장 자체도 오역이다. ‘하나의 창으로 보면 실제보다 더 근사해 보이는 게 인생이다, 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successfully looked at successful life로 생각한 듯하다. 부사가 수식하는 건 동사다.




오역을 떠나, ‘하나의 창으로 보면 실제보다 더 근사해 보이는 게 인생이다, 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라는 문장이 너무 뜬금없다. 문장 간 사고의 링크를 놓친 채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옮기면 이런 결과를 낳기 쉽다.




링크가 끊긴 문장은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뜬금없음 때문에 난해해진다. 여기서 고전을 대하는 독자의 ‘저자세’가 발생한다는 점이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다.




‘뭔가 좋은 말이겠지. 이 맛(?)에 고전 읽는 거겠지.. ’


sticker sticker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피츠제럴드 문장의 ‘드라이 유머’를 말하는 사람이 없는 이유를 이제 알겠다. 독자, 평론가 할 것 없이 ‘개츠비는 위대했나 아니었나’만 얘기하는 이유를 알겠다. 큰 서사 외에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은 것이다.




자기 풍자적인 ‘드라이 유머’(‘영국식 유머’와 비슷한 결)가 유머 자체로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숨은 이스터에그나 알고 보면 더 재밌는 말맛, 이런 얘기가 아니다. 작품을 이끌고 가는, 서술자 닉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다.




그 태도를 시각화한다면 눈썹 한쪽을 살짝 치켜뜬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반쯤은 진지하고, 반쯤은 상대(소설 속 상대와 독자 모두)가 못 알아차릴 정도로 냉소하는 태도다. 자신을 향해서도 마찬가지. 이 태도는 상류층의 위선과 모순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와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자신의 모순도 정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




그 도구를 제거하니 아이러니가 실종된다. 번역을 거치며 태도가 사라진 닉은 기계적 중립자, 기계적 관찰자로 보인다. 사실은, 피츠제럴드의 닉은 끊임없이 판단하고 냉소하는 관찰자이자 참여자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주인공 홀든이 ‘위대한 개츠비’를 좋아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닉(피츠제럴드)의 나레이션을 읽으면 20년대 점잖은 버전의 홀든이 떠오른다. 영미 비평에서 문학적 사촌으로 연결짓곤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자조적인 풍자톤이 곳곳에 배어있다. 주변 모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자신도 그 안에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번역본에서 ‘참 잘하는 짓이다’를 ‘You are doing great.’으로 옮기는 것과 같은 번역을 해놓은 바람에 독자들에게는 홀든과 닉의 명백한 고리가 뜬금없이 느껴질 것이다.




결과적으로 ‘위대한 개츠비’의 캐릭터와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오독’하는 게 아니라 아예 모호하게 받아들인다. 오독의 여지조차 없다. 닉도 모호한 사람, 개츠비도 모호한 사람, 소설 자체도 모호한 이야기가 돼버려서 ‘위대한가 아닌가’, ‘위대하다면 왜 위대한가‘ 이런 남의 다리 긁은 데 또 긁고 있는 사태가, 영원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고전이라는 카테고리에 욱여넣기에는 너무나 모던한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출간된 해는 1925년. 올해가 101년째 되는 해다. 그러나 한국에 진정한 모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도착한 적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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