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만나는 여행] 쿠알라룸푸르
이주 시물레이션

#1. 다시 짐을 싸는 이유

by 온셀OnCeLL

01. 지루함은 성실하게 찾아온다

1년 만에 다시 말레이시아행 티켓을 끊은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한국 일상의 견고함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평온해지자마자 내 안의 유통기한 알람이 울렸다. "익숙함에 속아 지루해지지 말 것." 이번엔 정적인 신도시 대신, 말레이시아의 심장인 쿠알라룸푸르의 소란함을 선택했다.


02.이번 여행의 진짜 속내는

사실 이번 여행의 속내는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묵직했다.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내며 이곳에 정착해 살 수 있을지를 가늠해보는, 이른바 이주 시뮬레이션이었기 때문이다.


조호바루가 '한달살기'라는 이름의 긴 휴가였다면, 쿠알라룸푸르는 내 아이가 매일 아침 교문을 통과하고, 내가 이 낯선 도로를 일상처럼 운전하며 장을 보고 살 수 있을지를 시험하는 임상 시험대였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귀로 듣고, 내 몸으로 경험하지 않으면 평생 "그때 가봤더라면 어땠을까"라는 미련이 나를 괴롭힐 것 같았다.


적어도 몰라서 못 하지는 말자. 그 끝이 환상의 붕괴나 짙은 아쉬움일지라도, 나는 직접 부딪쳐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한 결론을 얻고 싶었다. 아이들에게도 막연히 무언가를 상상하고 짐작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가보니까 이렇더라."고 말하며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는 태도를 선물하고 싶었다. 거창한 교육 철학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내 마음의 팔할은 국제학교 다니는 삶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여행은 신나게, 고민은 치열하게"라는 명쾌한 모토를 품고, 우리는 쿠알라룸푸르로 향했다.


03. 준비는 설렜으나, 시작은 황당하더라

떠나기 두 달 전부터 나의 밤은 구글 맵과 정리 문서철로 채워졌다. 쿠알라룸푸르 내 100여 개가 넘는 국제학교 리스트를 뽑아 학비, 커리큘럼, 한국인 비율, 그리고 주거 환경을 꼼꼼히 따졌다. 몬키아라의 화려함 보다는 로컬의 색채가 강하면서도 교육의 질이 보장된 곳을 찾고 싶었다.


후보지를 좁혀가며 영어로 서툰 메일을 써 내려갔다. 최종 선별한 학교에 트라이얼 수업을 문의했고, 그렇게 우리 아이들은 쿠알라룸푸르의 이튼 국제학교를 5일간 다닐 기회를 얻었다.


아이들도 이번 여행이 예전과 다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엄마, 거기 가면 진짜 외국 친구들이랑 수업 듣는 거야? 나 영어 잘 못하는데 어떡해?" 걱정하면서도 아이들의 눈은 반짝였다. 유투브로 학교 홍보영상을 수시로 찾아보며 급식메뉴를 궁금해하고, 어떤 영어 이름을 쓸 지 고민하던 모습이 대견했다.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새로움으로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에, 평소 타지 않는 바틱에어를 예약했다.


모니터 하나 없는 7시간의 고요한 비행, 유료 생수, 그리고 용기가 필요했던 무료 키즈밀의 실체. 한 숟가락 뜨고 조용히 반납하는 아이들을 보며 미안함과 웃음이 교차했다. "엄마,다음엔 그냥 우리한테 익숙한 거 타면 안될까?" 아이들의 뼈 있는 농담에 가슴은 쓰렸지만, 한편으론 짜릿했다. 그래, 이런 게 여행이지. 세상이 늘 내 입맛에 맞는 서비스만 차려주는 건 아니란다.


낯선 공항에 내려 입국 심사를 척척 해내고, 그랩을 불러 숙소에 도착했을 때의 그 성취감이란. 수없이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을 연예인 마주하듯 대면하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낯선 경험이 뇌에 신선한 회로를 만드는 이 감각. 이 중독적인 생동감 때문에 내가 다시 짐을 쌌다는 것을 말이다.

Gemini_Generated_Image_mezn18mezn18mezn.png 가자, 쿠알라룸푸르로!


[여담: 사실은 이렇습니다]

이주 시물레이션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3주간의 실체는 ‘한국판 억척 엄마의 쿠알라룸푸르 확장판’에 가까웠다. 유명한 숙소에도 개미들은 번식했고, 커다란 바퀴벌레를 한밤중 부엌에서 마주했을 땐 너무 놀라 냄비 뚜껑으로 덮어야 했던 무서운 밤들이 있었다. 낯선 땅에서 어떻게든 아이들과 생활하며 길을 찾아낸 나의 생활 근육이야말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탄탄하게 벌크업 된 결과물이었다. 역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다큐멘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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