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랑카위, 쉼표의 재발견
말레이시아의 북서쪽, 안다만 해에 떠 있는 99개의 섬 중 가장 큰 주인공인 '랑카위'.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섬이자, 섬 전체가 면세 구역인 여행자들의 낙원이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비행기로 고작 1시간이면 닿는 거리지만, 그곳과는 공기부터 달랐다.
사실 이번 랑카위 여행의 동기는 명확했다. 2주간 쿠알라룸푸르에서 현지 적응이라는 미션을 치르며 우리 가족은 꽤 지쳐 있었다.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고 낯선 도로 위에서 비명을 지르던 일상. 우리에겐 생활이 아닌 진짜 여행이, 무엇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방전의 시간이 절실했다.
쿠알라룸푸르가 치열한 생활의 시뮬레이션이었다면, 랑카위는 그 중간에 찍은 커다란 쉼표였다. 재미있는 건, 3주간 머물던 쿠알라룸푸르가 어느새 집처럼 느껴져 랑카위로 떠나는 길이 마치 집 근처로 다녀오는 2박 3일 동남아 휴양지 같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30년 된 클래식한 '홀리데이 빌라 리조트'에서 3일 내내 수영복을 입고 지냈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새로운 자극과 갈망을 좇아 자리를 금방 뜨는 사람이었다. 한곳에 진득하게 머물며 여유를 누리는 법을 몰랐던 내게, 이번 휴양은 그 어떤 액티비티보다 생경하고 강렬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성급하게 자리를 뜨지 않으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인피니티 풀에서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기다리자, 하늘은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며 찬란한 보랏빛 선셋을 선물했다. 물놀이 후 나른한 몸으로 먹는 감자튀김의 고소함, 끝을 정해두지 않은 채 누리는 편안함은 초반의 호기심만 채우고 떠났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감각이었다.
해 질 녘까지 바다와 수영장을 오가며 놀던 아이들은 한식당에서 한식을 먹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이렇게 좋은 랑카위를 어떻게 잊어"라고 속삭이는 아이들의 고백을 들으며, 나는 비로소 분주히 움직이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우리가 이 여행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결국 함께 웃는 기억의 신선도였음을 증명하는 밤이었다. 무한할 것만 같던 랑카위의 휴양은, 나에게 '멈춤' 역시 성장의 한 방식임을 가르쳐 주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사악했던 주류세가 랑카위에선 마법처럼 사라진다. 캔맥주가 생수만큼이나 저렴해지는 기적을 마주하며, 어른들의 휴양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우리 가족을 무장해제 시킨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한식당에서 만난 된장찌개와 김치전이었다.
낯선 향신료와 단순한 음식에 지쳐갈 때쯤 만난 그 칼칼하고 시원한 맛은, 너무나 다정한 위로가 되었다.
진짜 맛있다며 깔깔거릴 수 있는 익숙한 편안함. 결국 여행의 묘미는 새로운 것을 보는 짜릿함 50%와, 그 낯선 곳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익숙함을 재발견하는 안도감 50%로 채워지는 게 아닐까.
랑카위의 밤은 그렇게 가장 세속적이고도 가장 충만한 행복의 농도로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