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만나는 여행] 쿠알라룸푸르이주 시물레이션

#4. 쿠알라룸푸르와 서울의 데칼코마니

by 온셀OnCeLL

01. 낯선 도시에서 발견한 익숙한 얼굴

쿠알라룸푸르에서의 3주를 뒤돌아보며 사진첩을 넘기다 문득 멈칫했다. 화면 속 풍경은 분명 이국적이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우리의 모습은 서울에서의 일상과 기묘하게 닮아 있었다. 아침 일찍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수업이 끝난 아이들과 페트로사인스 과학관을 누비고, 수리아몰 푸드코트에서 메뉴를 고민하고, 롯데월드 아이스링크 대신 IOI 몰 스케이트장을 찾았다.


지루함을 피해 떠나온 곳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의 루틴을 성실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박물관과 교육 체험을 찾아다니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숙소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며 보낸 시간들. 그것은 관광이라기엔 너무나 삶에 가까웠고, 삶이라기엔 지나치게 여행 같았다. 쿠알라룸푸르와 서울, 이 두 도시는 내 삶이라는 도화지 위에서 정확히 포개지는 데칼코마니였다.


02. 장소가 아닌 '태도'의 문제

"여기까지 와서 결국 한국이랑 똑같이 살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GMBB 몰에서 아이들과 레진 아트 시계를 만들고, 로열 셀랑고르에서 땀 흘리며 주석 그릇을 두드리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지루해했던 것은 서울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그 공간을 대하는 나의 무뎌진 감각이었다는 것을.


서울에서는 숙제처럼 느껴졌던 아이들과의 체험 학습이, 이곳에서는 생생한 모험이 되었다. 같은 행위였지만 낯선 공기와 낯선 언어라는 필터가 끼워지자 일상의 모든 색깔이 다채로워졌다.


물론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서울은 여전히 아이들과 가볼 곳이 넘쳐나고,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 체험이 발에 치이는 도시다. 오죽하면 그 무궁무진한 인프라 때문에 지루함을 탓하면서도 꿋꿋이 서울 하늘 아래 터를 잡고 살고 있겠는가. 사실 서울이 할 게 없어서 지루한 게 아니라, 너무 다 잘 되어 있어서 내 감각이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결국 일상의 유통기한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그 장소가 주는 자극에 내가 얼마나 주체적으로 반응하느냐라는 아주 단순한 진리였다.


03. 다시 가도 똑같이 살 것 같은 예감

누군가 내게 다시 쿠알라룸푸르에 가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때도 나는 지금과 똑같이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서울과 다름없는 일상을 보낼 것이다. 학교에 보내고, 수영장에 풍덩 빠지고, 맛집을 검색하며 헤매는 그 평범한 일들 말이다.


하지만 그 익숙함은 예전의 지루함과는 결이 다르다. 낯선 도시에서도 서울의 삶을 변주할 수 있는 나만의 생활 근력이 생겼으니까.

Gemini_Generated_Image_vsemxdvsemxdvsem.png 쿠알라룸푸르의 일상

[여담: 사실은 이렇습니다]

쿠알라룸푸르 마지막 날, 짐 정리를 하며 아이들은 방학 숙제인 일기를 썼다. 아들의 일기 제목은 "맛있어도 적당히". 수란에 찍어 먹는 카야 토스트에 반해 과식했다가 하루 종일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글이었다.


그걸 보며 나는 웃음이 터졌다. 그래, 여행도 삶도 결국 적당한 농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너무 과하면 탈이 나고, 너무 모자라면 지루해진다. 3주간의 적당히 맵고 달콤했던 시간 덕분에 내 일상의 유통기한은 다시 넉넉하게 연장되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이들은 또 "이 항공사는 진짜 아니야"라고 투덜댔지만, 나는 안다. 우리는 분명 다음 여행에서도 "그땐 그랬지" 하며 이 좁은 좌석의 기억을 가장 먼저 꺼내 먹을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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