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리고 추억

by 틈새

짙은 안개 사이로 가느다란 빗줄기가 명상의 숲을 서서히 적셔 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봄, 나는 학교 방송 반이었다. 학교 일과가 모두 끝나고 나면 방송실에서 학교 교정인 명상의 숲에 음악을 낮게 내어 보냈다. 학생들은 가방을 들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숲 속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그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후. 나는 음악을 틀어 놓고 방송실 작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똑똑’ 방송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빗소리 속에 묻혀 들려왔다. 문을 열자 목이 길고 눈이 작은, 모딜리아니 그림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을 닮은 3학년 언니가 우수에 찬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오페라 「나비부인」 중에 나오는 <허밍코라스>를 틀어줄 수 있겠니?”

‘저토록 슬픈 눈을 가진 여자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빗소리와 함께 낮은 음률의 허밍 소리가 슬픈 곡조로 울려 나왔다. 아!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비 오는 날 이렇게 어울리는 음악이 있다니…….


그다음부터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그 음악을 틀었다. 두 번, 어느 날은 또 세 번.

어느 오후, 복도에서 모딜리아니 선배와 마주쳤다.

“지난번 비 오는 날 그 음악을 틀어주었지? 고마워.”

그 선배는 여전히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가고 명상의 숲에 가을이 찾아왔다.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나는 방과 후에 <허밍코라스>를 턴테이블 위에 올리고 볼륨을 조절했다. 음악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도 없이 방송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국어 선생님이 성큼 방송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 음악을 트는 아이가 바로 너였구나! 비 오는 날 들으면 너무 애상적인 이 음악…. 아, 역시 너는 멋을 아는 아이야!”

그 특유의 제스처를 쓰며 국어 선생님은 나를 멋을 아는 아이로 만들었다. 사실, 멋을 아는 아이는 내가 아닌데….



오늘, 11월 마지막 날,

문득, 고등학교 때의 그 선배 생각을 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 그 선배는 지금도 비가 내리는 날이면 <허밍코라스>를 들을까?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는지, 여전히 슬픈 눈을 하고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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