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후의 소식

11월

by 틈새

바람이 불고 있었다.

12월보다 오히려 더 쓸쓸한 11월 오후에 황량한 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이 부는 날은 마음이 흔들린다. 그것도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이 부는 오후면 추수가 끝난 텅 빈 허허벌판에 혼자 서있는 허수아비처럼 외롭다.

이런 날이면 문득 멋있어지고 싶어진다. 청바지를 입어도 폼 나게 입고 싶고 원피스를 입어도 우아하고 싶다. 앞머리는 조금 내려 가지런히 자르고 어깨까지 늘어뜨린 생머리를 바람결에 나부끼며 커다란 토트백 안에 책이랑 노트를 넣고 거리를 걷다가 도서관에 가고 싶다. 가을햇살 따사한 창가에 앉아 연필을 손에 들고 마음에 드는 구절에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고 싶다.

아직 20대 인양 착각에 빠져있는 그런 오후에 그녀의 전화가 날 와락 현실로 끌어 내린다.

“바람 부는 11월의 오후를 견딜 수 없어.”

“나도.”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는 가을이 사뿐히 내려와 자리 잡기를 하고 있다. 호수 주변의 산책로 가득 청아한 가을바람이 출렁이고 밤공기 속에 묻어나는 가을 냄새, 마른풀 냄새, 그리고 해가 진후의 고요가 나를 감미롭게 감싼다.

그녀는 올이 굵게 짜인 빨간색 두툼한 털옷에 크림색의 털목도리를 칭칭 두르고 나타났다. 추위로부터의 방어인가? 외로움으로부터의 방어인가?

“우와! 빨간 스웨터의 귀여운 여자!” 했더니 예의 모습으로 경쾌하게 웃는다.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웃고 있지만 그 웃음 뒤에 웅크리고 있는 가을의 고독을 내게 들키고 있다. 아니, 나도 함께 느끼고 있다.

가끔 밤 시간에 집 앞 가까운 곳에 와있다고, 차 한 잔 마시자고 청하는 그녀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런 날이면 입고 있던 옷에 카디건 하나 걸치고 모자 푹 눌러쓰고 나가 그녀와 즐겁게 차를 마신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유안진님의 지란지교. 바로 ‘그녀와 나’이다.

그녀를 만나면 늘 새로운 의욕이 생기고 변화를 꿈꾸게 된다. 그 변화는 곧 희망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고 그보다 더 나은 그 다음날을 다짐하기도 한다.

그녀는 내게 없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나처럼 사소한 일에 감정을 소모하며 흥분하지도 소심하게 매달리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넣어 판단하지 않는다. 충분히 속상할 일에도 그냥 쿨하게 넘어가는 여유도 가지고 있다. 나는 힘들게 내리는 결정도 그녀는 너무 쉽게 한다. 항상 경쾌한 모습으로 산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덩달아 즐거워지고 마음이 편해진다.

그날 호수가 보이는 찻집에서 그녀는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말했다.

‘아이를 외국에 보내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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