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종이에 날렵한 펜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온 제자에게 답장을 써야지 생각만 하다가 달을 넘기고 있다. 이제 종이에 손으로 편지 쓰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 일이 되어버렸을까? 한때는 일상의 일이 아니었던가.
세상을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 것만 같았던 중학교 2학년 때 반 친구 한 명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봉투에 집 주소를 쓰고 우표를 붙여서 빨간 우체통에 넣곤 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먼저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까? 아니 어쩜 그 아이가 먼저 보냈고 내가 후딱 답장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다. 키가 작은 나는 키가 앞줄에서 놀았고 그 아이는 키가 커서 뒷줄 아이들과 다녔다. 음악책을 들고 음악실로 이동할 때면 나는 친한 아이들과 웃고 얘기하며 복도를 지나갔다. 그 아이는 늘쩡거리는 키 큰 아이들과 어울려 천천히 이동했다. 간혹 스치게 되면 순간 눈빛을 마주치기는 했다. 1초 정도의 순간에 그 아이는 ‘늘 너를 바라보고 있어.’라는 눈빛을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학교에서 그 아이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눠본 기억은 없다. 그런데 편지로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에 관한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한 편의 글을 쓰듯 주변의 일을 얘기했고, 읽고 있는 책에 관해 쓰기도 했고, 그날 교실의 풍경을 소설 쓰듯 쓰기도 했다. 그 아이가 어디에 사는지, 외동딸인지, 나처럼 딸 부잣집 딸인지, 오빠가 있는지, 언니가 없는지 전혀 몰랐고 궁금하지 않았다.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중요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편지는 특별하지 않았지만 편안했다. 학교가 끝난 후 집에 왔는데 그 아이가 보낸 편지가 책상 위에 놓여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봉투를 뜯고 꺼내어 읽으면 그 아이도 나도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3학년이 되었다. 반이 달라졌고 편지는 중단되었다. 우리는 그대로 얘기 한번 나눠보지 않은 낯선 친구가 되었다.
직접 마주 앉아 별스럽지도 않은 어제의 얘기에 까르르 웃고 그 웃음은 공감의 순간으로 하나가 되게 하고, 그게 아니라고 티격태격하며 토라졌다가 참지 못하고 3일 만에 다시 화해하는, 그런 일이 반복되는 사이의 친구가 아닌, 고품격의 관계는 남는 것이 없었던 것일까?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갑자기 오던 편지가 오지 않을 때도, 보내던 편지를 쉴 때도 정서의 흔들림이 없이 당연한 일로 자연스럽게 적응해 가는 사이. 그건 진정한 우정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아이와 같은 여자고등학교에 진학해서 3년을 다녔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의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그 도시의 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하여 지내던 어느 날, 건너편 길에 있는 유명한 제과점에서 나오는 그 아이를 먼발치에서 보았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거리에서 그 아이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콜라병을 손에 들고 마시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아이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 묻힐 때까지 바라보았다.
혹시 같은 길에서 마주쳤더라도 우리는 어둠 속에서 1초 정도 시선을 마주치고 자연스럽게 어깨를 스치며 지나쳤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그런 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