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환해졌다. 사방이 밝아졌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베란다로 나가보았다. 방금 하늘색 크레파스를 칠한 것 같은 고운 빛 하늘이 넓은 창 가득 펼쳐져 있다. 듬성듬성 떠다니며 노닐고 있는 흰 구름은 테두리까지 말끔하게 돋보인다. 한가하게 졸던 낮달이 가까이 다가와 눈을 비비며 날 바라본다. 낮에 나온 반달이 참 예쁘고 다정하다.
창밖의 강은 푸르게 흐르고 다리 위를 달리는 차들의 색상은 다른 날보다 선명하다. 강 너머 건물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깝고 물 위에 세밀하게 비치는 풍경은 모네의 그림을 닮아있다. 모두가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며칠 전부터 엘리베이터 게시판에 창문 외부 청소에 대한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아침에 외출할 때 고층 아파트 외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받침대에 앉아 곡예사처럼 창을 닦고 있는 작업복 입은 남자를 보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아찔해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피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사방이 환해진 것이다.
문득 창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창은 두 팔 벌리고 자신을 다 내어주고 있다. 방어하려야 방어할 방법도 없지 않은가. 애당초 그럴 생각조차 없이, 설계된 틀에 얹혀 모두를 받아들인다. 가늘게 내리는 보슬비도 세차게 쏟아지는 소나기도 다 안아준다. 한겨울 눈보라 속의 눈송이들 다 품어내며 시리고 아픈 생채기들로 얼룩지며 무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앞 베란다에 나가 고층빌딩 위쪽으로 해가 떠오를 때 돋을볕을 바라보고, 저녁이면 작은 방의 서쪽 창을 열고 하늘 넓게 피어오르는 꽃노을을 본다. 코로나19 때문에 여행은 물론이고 외출도 자제하며 지내다 보니 이 시간이 나에게는 소중한 일과가 되었다. 내일부터는 이 풍경이 본래의 모습으로 또렷하게 빛날 것이다.
상쾌해진 기분을 차 한잔에 담아 마시며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깨끗해진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밝고 산뜻하다. 이것이 제 모습이다. 그런데 내 마음의 창은 깨끗한가? 내게 던지는 물음이 내 안에서 맴돌았다. 깨끗한 창으로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가? 선입견으로 얼룩지고 고정관념으로 상처가 나서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왜곡되고 받아들이는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다 마신 찻잔 바닥을 바라보며 또 생각한다. 퇴직하기 전 학교에서 나의 아이들을 대할 때 잘 닦인 창으로 바라보았을까? 들려오는 얘기들로 또는 한 번의 행동으로 그 아이를 규정해버린 일이 없었을까?
어느 시인은 유리창 앞에 서서 병으로 떠난 아들의 모습을 그리며 훌륭한 시를 남겼는데 나는 창 가득 넘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때늦은 자기반성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