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 <인간실격>
이 책을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읽다 보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어딘가 마음이 계속 불쾌하고 속에서는 마치 무언가가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주인공 요조의 행보와 그 내면적인 심리묘사를 보고 있자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일종의 수치심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위험하고 어떤 면에서 매력적이기까지 한 이야기는 내가 그 이야기에 관심을 떼어내고 제목만 보이는 채로 책장에 꽂아 먼지만 쌓여가게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 부끄럼은 요조 자신에게뿐만이 아니라 그의 수기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부끄럼 많은 생애'에 조금이나마 발을 걸치게 만들었다. 원치 않은 범죄 현장의 공범이 된 것만 같은 이 찝찝함은 소설이 끝나기까지, 아니 끝난 뒤에도 설익는 과일을 먹은 뒤 떫은맛처럼 계속 입안을 맴돌았다. 어쩌면 <인간실격>이라는 독특한 제목을 보고 내가 그 설익은 책에 손을 뻗었을 때 이미 예견되어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는 도무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요조에게 '익살'이라는 것은 그 자신만의 필사적인 인간을 향한 이해의 시도이자 구애였다. 우리가 사회생활이니 기초적인 예의니 하며 부르는 그것들은 사람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한 가면이라면 요조의 익살은 '인간'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마지막 연결고리이자,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살아내려는 저항의 시도였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익살은 이해하기 힘든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조금 더 민감한 사회생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것이 우리의 처세술과는 다른, 말하자면 생존본능과 더 가까운 것임에는 틀림없다.
요조에게는 호리키라는 친구가 있다. 서로를 경멸하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혹은 자존감을 위해 곁에 두는 것을 친구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와 요조는 옥상에서 반의어를 말하는 게임을 한다. 여기에서 요조는 묻는다.
'죄의 반의어는 무엇인가?'
요조가 자신에게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을 돌아보는 민감함과 여기서 나오는 수치심일 것이다. 그렇다면 죄의 반의어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둔감함 내지는 뻔뻔함이 아닐까? 정답을 알아야지만이 스스로에게 오답이라는 죄의 낙인을 찍고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요조가 그런 호리키에게서 배운 가장 유익한 정보가 있다면, 그것은 세상이라는 것은 개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세상이라는 막연한 대상에 대한 공포는 지워줄 수 있을지 몰라도, 세상에게 받은 모든 것이 내 옆의 개인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비참함을 더해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투명한 유령보다 구체적으로 나를 미워할 수 있는 개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닐까? 인간의 처세술이라는 것은 개인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뢰. 그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임에 틀림없다면, 요조의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불려도 손색없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꽃이 세상에게 더럽혀졌을 때에, 요조는 묻는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입니까?"
그 끔찍한 비극이 요조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한다. 그의 유약한 성격은 이런 때에 마저 충실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내었던 것이다. 적어도 인간의 세상에 있어서 무저항이나 신뢰는 용서받지 못할 죄임이 틀림없었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를 인간이라는 것에게서 실격시켜버리면서, 그가 이해하지 못했던 인간의 삶을 살아보려는 노력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런데 요조가 그토록 이해하고자 구애했던 그 '인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소위 '인간'이라는 모양 안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 인간들은 자신이 인간에게서 실격당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채로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복이라는 결승점을 향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그 인간이라는 것에 부합한 인간이 있기는 한 것일까?
책을 읽어갈수록 커져만 갔던 그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이제는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요조의 그 부끄럼 많은 생애 속에서 내 삶을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거울을 본 것 같은 불편함이었다. 그 떫은맛을 내는 과일이 애초에 설익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책의 많은 내용 중에서도 마지막 마담의 말이 소설의 어떤 문장들 보다도 더욱 섬뜩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아는 요조는 ... 하느님 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아아. 요조의 익살은 끝끝내 주변의 모든 사람을 속이는 데 성공해 버렸던 것이다. 그의 비극적인 삶 전체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고 있는 구애의 춤이었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그러나 마지막 저 마담의 무심한 한마디는 그가 필사적으로 그려온 질문의 흔적을 단지 '착함'이라는 단편으로 눌러 압사시켜 버렸다. 한 사람의 인생이 지워져 버린 이 끔찍한 현장 앞에서 나는 이야기의 어느 부분보다도 더한 찝찝함이 느껴졌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뒷장을 넘기자 글에 대한 해설이 있었다. 그 해설은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로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의 삶과 이 작품을 해독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해독이라는 말이, 나아가 그 비평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설을 읽어갈수록 소설에서 마담이 남긴 마지막 말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기분이었다. 열심히 적어둔 역자에게는 죄송할 따름이지만, 난 결국에는 그 해설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책을 덮어버렸다.
책을 덮어버린 후에 문득 이야기 초반에 등장했던 다케이치가 떠올랐다. 요조에게 필요했던 것은 호리키가 그에게 보내는 경멸도 마담의 칭찬도 아니라, 오히려 다케이치와 같은, 그의 익살을 까발려줄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침대 밑에 숨겨두었다가 끝내는 분실해 버린 도깨비 그림을 보여 줄 수 있을만한, 부끄러움을 아는 삶을 사는 공범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