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필연적인 오역에 대하여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

by 김준겸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13

"서로 사랑하라"

이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예로부터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졌다. 나도 이것에 대해 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살았다. 물론 그것을 실천하며 사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최근에 고윤정이 주연으로 나오는 <이 사랑 통역 되나요?>라는 드라마를 보고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피어올랐다. 나의 머릿속에 담긴 사랑이라는 개념은 새벽녘 길가에 끼어있는 안개처럼 뿌옇고 흐릴뿐더러 제대로 잡히지도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그토록 중요하다는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사랑하라는 덕목을 가르쳐준 사람들 또한 이를 명확히 알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학창 시절 선생님이 중요한 수학 공식을 칠판이 닳도록 설명해 주시듯이, 사랑에 대한 것 또한 마땅히 그랬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마치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집안의 가보처럼 모두가 그것을 전하지만 누구도 열어볼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사랑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되려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상대방을, 혹은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대상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대상을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까. 어쩌면 사랑한다는 욕망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일지 모른다. 사랑은 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큐피드의 화살이 아니라 날아갔다가 끝내는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부메랑과 같은 것일까?


사랑이 부메랑과 같기에 우리는 그것을 던졌을 때 다시 돌아오리라는 기대감을 품는다. 기대감은 우리가 던진 부메랑이 더 클수록, 더 빠를수록 더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다. 이토록 부푼 기대감이 상대방의 침묵 속에서 스스로 터져버릴 때, 그 속에서는 품었던 기대와 같은 크기의 실망감, 증오와 같은 감정들이 쏟아져 나온다. 둘 다 상대방에게 강력한 감정을 가진다는 점에서 증오는 사랑의 반의어가 아니다. 증오는 사랑의 유의어다. 사랑의 반의어는 오히려 무관심에 가깝다.






<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내가 대상을 안다면, 나는 그 대상이 원자적 사실들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또한 안다."


논리학의 차가운 명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뜨거운 본질을 꿰뚫는다. 우리는 대상보다는 대상을 지향하는 상태 자체를 원한다. 대상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는 거울이다. 여기서 대상자체는 조건만 맞다면 흥미에 따라 얼마든지 바뀌고는 한다. 중요한 건 지향성 자체지 대상이 아니다. 택배의 내용물보다는 그 택배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설렘을 준다. 택배를 받아 들고 그 포장을 뜯는 순간, 이전까지의 기대는 거품처럼 사라진다.


대상이 품은 다양한 가능성은 우리의 '사랑'을 더 풍성하게 해 준다. 그러나 대상의 모든 가능성을 파악하여(혹은 파악하였다고 생각하여), 우리가 대상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대상에 대한 흥미를 잃는다. 기대를 담아줄 새로운 택배가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무언가를 지향하는 상태를 우리는 '욕망'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사용하는 이 욕망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묻어 나온다. 인간은 수천 년간 욕망을 하나의 치부로 여기고 이성이라는 천으로 감싸 깊숙한 곳에 감춰왔기 때문이다. 그 흔적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다. 그러나 사랑역시도 욕망의 산물이다. 우리는 대상을 성적으로, 소유적으로 혹은 다른 어떠한 욕망적으로 말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며 이것 위에 사랑이라는 포장지를 씌웠다. 그러니 포장지를 뜯어보면 흥미가 식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욕망이 나쁜가? 단연코 욕망 그 자체가 악(惡)인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욕망의 교합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욕망으로 빚어진 육체를 물려받는 동시에, 선악을 구분하는 금단의 열매 또한 건네받았다. 이것이 인간의 태생적 비극이다.​ 욕망의 적나라한 민낯을 견디지 못한 문명은 그것에 '죄'라는 낙인을 찍어 추방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해야 욕망을 지하실 어두운 곳으로 밀어 넣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역사 속에서 욕망은 언제나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꿈틀거리고, 틈만 나면 고개를 쳐들었다. 욕망을 죄악이라 규정하고 단죄하려 드는 그 성스러운 빛조차, 실은 욕망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가진 또 하나의 머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스피노자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힘을 '코나투스'라 불렀고, 니체는 이를 '힘에의 의지'라 불렀다. 인간, 나아가 생명체 자체가 욕망의 얽힘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장(Field)이다. 우리는 욕망으로 그어진 줄 위에 끊임없이 포석을 늘어놓으며 살아간다. 인생이 바둑과 같다는 옛사람들의 말은 이런 의미에서 틀리지 않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에서 주인공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금각을 불태움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소유하려 든다. 이것은 아름다움, 즉 욕망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해석이다. 사랑도 이와 비슷할 때가 많다. 대상을 태워 재로 만듦으로써 욕망을 완성하고, 또 다른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소비적 연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전제 하나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욕망이 식는 원인이 정말 대상의 가능성이 고갈되었기 때문일까? 과연 우리는 대상을 '다 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앎을 포기해 버린 스스로의 태도를 다 알았다는 지적 오만으로 포장해버린 것은 아닐까?


​금각을 불태우는 것도 소유의 한 방법일지 모른다. 그러나 금각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길이 오직 파괴뿐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거대한 금각을 한눈에 담을 수 없다. 그렇기에 한 발만 옆으로, 혹은 뒤로 물러서도 그곳엔 전혀 새로운 풍광이 펼쳐진다. 우리가 불태워야 할 것은 금각이 아니라, 금각을 고정된 것으로 바라보던 우리의 낡은 관점이다. 그 타버린 관점의 재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를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으로 구분했지만, 나는 이 무궁무진한 삶의 태도를 단 두 가지로 양분하여 정답인 양 제시하고 싶지는 않다. 철학의 역할은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답을 제시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종교의 몫이다.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의 태도를 끊임없이 새로 쓰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문장은 꽤나 유명해서 들어본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사랑이야말로 단순히 말로는 통역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부모님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시지 않았다. 부모님의 사랑은 우리 삶에 대한 행동으로, 기억으로 보여진다. 말할 수 없는 것은 행동으로 보여주면 된다. 부모님의 사랑뿐만이 아니다. 연인이든 친구든, 진짜 사랑은 혀끝이 아니라 손끝에서, 말보다는 기억으로 증명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 것은 지피티 같은 LLM이지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사랑마저도 자신만의 언어로, MBTI 같은 틀로 통역하려 든다. 그 과정에서 오역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통역을 멈출 수 없다. 통역해야만 비로소 타인에게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에 있어 중요한 것은, 한 번의 완벽한 통역이 아니라 오역을 인정하는 용기다. 지금의 이해를 확신하지 않고, 어제의 오역을 딛고 오늘 다시 끊임없이 통역하려는 그 태도. 어쩌면 사랑이라는 난해한 원서(原書)를 읽어내는 방법은 그것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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