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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카피 May 07. 2023

말아먹은 결혼기념일

온 가족이 함께 김밥 말아먹은 이야기

5월 7일이 결혼기념일인 분들은 다들 같은 마음일 거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사이, 누구 하나 챙겨주는 사람 없고, 부부 역시 여기저기 챙기느라 정작 자신들의 결혼기념일은 매년 어영부영 넘기고 말아 온 날들을 말이다. 올해 역시 12번째 결혼기념일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사이, 그것도 연휴 속 일요일이었다.


선물은 언감생심, 아이와 일요일 하루 세끼를 어찌할 지부터 고민이었다. 아침은 간단히 패스트푸드로 해결하고 점심은 어떡할까 하다 며칠 전 사두었던 김밥 재료가 떠올랐다. 마침 김은 없어 집 앞 슈퍼를 가야만 했다. 털래털래 김을 사 와선 계란을 부치고 당근을 볶고 우영, 햄, 단무지를 가지런히 두었다. 헉! 어묵이 어딨 더라. 그만 깜빡하고 만 어묵은 생략하기로 했다. 냉동실의 어묵을 꺼내 넣기엔 타이밍도 아니었다. 뭐 재료 하나가 없으면 어때. 우리가 함께 만들어 먹는다는 게 중요하지.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는 어린이날에 갖고 싶은 선물을 사주는데 왜 넌 엄마, 아빠의 어버이날엔 아무것도 주지 않냐고. 웃음으로 때우려는 아이에게 재료는 모두 준비했으니 김밥을 맛있게 말아달라고 했다. 물론 단단히 꽉 말지 못해 조금은 느슨한 김밥이 되었지만 마음만으로 모든 고마움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기념일엔 맛있게 온 가족이 김밥을 말아먹었다. 너무나 맛있는 김밥을, 서로의 고마움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온 가족이 책을 읽고 밀린 집안일을 하다 보니 벌써 저녁이 찾아왔다. 저녁 수업을 하러 가야 하는 아내를 위해 이번엔 내가 소매를 걷었다. 세상에 가장 간단히 만들어 먹는 국수를 만들기 위해 냉장고의 재료들을 꺼냈다. 호박과 양파는 채 썰어 볶고 계란은 투박하게 지단으로 부쳐냈다. 국수 4인분을 끓여내 차가운 물에 씻어두고 육수를 만들었다. 시판 멸치 다시팩 2개를 넣어 5분간 끓여내고 소금과 국간장으로 간을 했다. 이게 끝이다.

면을 그릇에 담고 육수를 부은 후 고명을 올려 먹으면 끝. 맵찔이 우리 가족에겐 양념장 따윈 사치다. 혹여나 싱거울까 봐 걱정을 했지만 아이는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입속으로 들이부었다. 아내와 난 살짝 싱거워 김치를 곁들이니 더할 나위 없다. 남은 면엔 농장에서 갓 따온 상추를 넣어 시판 초고추장을 넣은 후 참기름과 함께 비볐다. 환상적인 맛이다. 다음엔 면만 삶아내 초간단 비빔국수만 해 먹어야겠다며 서로 엄지척을 날렸다.

결혼기념일 두끼를 제대로 말아먹었다. 점심은 김밥을 말아먹고 저녁은 국수를 말아먹었다. 이토록 맛있게 말아먹은 날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연휴 3일 내도록 비가 왔고 외식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영업자들의 한숨이 내 귀까지 들리는 3일이었다. 내일은 둥근 해가 떠서 맛으로 멋으로 물드는 5월의 푸르름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내년 결혼기념일엔 꼭, 난 안 먹지만 아내는 가장 좋아하는 양곱창을 사줄 수 있기를 미리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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