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같은 직장, 근무지가 달랐던 그는 대기업 홍보팀으로 이직했다. 작년 중반에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는 그가 덤덤히 그간의 일을 쏟아냈다. 갑상선 추적관찰 소견 이후 다시 찾은 병원에서 암 초기지만 수술을 권유했고 다행히 수술 이후 복직해 느꼈던 그의 인생에 대한 소회를 말이다.
덤덤한 그에 비해 화들짝 놀라는 내게 그는 두 가지 삶의 지혜를 알려줬다. 일과 삶의 철저한 분리, 그리고 야채와 과일을 가까이하라는 당부. 시니어급 초반인 그는 이직 후 마치 주니어급 초반처럼 온통 일에 자신을 갈아 넣었다. 스포츠패션 브랜드가 아닌 처음 접하는 브랜드 담당자로서 그는 누구보다 빛나야 했고 그것만이 자신을 외부에 알리는 또한 스스로에게 칭찬받는 최선의 과정이라 여겼다.
그렇게 2년을 꼬박 회사에 모든 것을 바쳤다. 갓 태어난 아들을 돌볼 새도 없이 자신에 대한 혹사가 자신을 위한 투자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얻은 병, 다행히 초기라 수술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병가를 마치고 그는 일과 삶의 분리를 실천하며 철저히 자신을 트레이닝하고 있다고 했다. 더불어 매일 야채와 과일을 섭취하고 있다고.
가족력이 있는 분들은 다들 공감할 것이다.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누나를 둔 나로선 늘 쉼 없이 건강 관리를 해야 하지만 저녁 술자리를 가지다 보면 어김없이 흐트러진 나를 발견하고 만다. 10년을 넘게 매일 아침 출근 전 부추와 과일을 갈아먹는 루틴을 귀찮다는 이유로 가끔 빠뜨려 먹기도 하고 과음으로 괴로운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한 통의 전화로 다시 그 귀찮은 부추 주스 루틴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말 농장에 작은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365일 부추를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했다. 냉장고에 과일이 늘 있지만 하필 없는 날엔 부추만 넣어 요구르트를 넣어 갈아 마신다. 제철 과일과 부추의 조화 속에 불안한 내 마음도 함께 갈아 마신다.
주말, 아이를 위해 점심을 만들었다. 야채라곤 당근과 양파, 파프리카가 전부다. 한우 등심과 함께 참기름으로 볶아내고 시판용 함박스테이크에 계란프라이 뚝딱 만들어 올려 플레이팅을 마치고 아이에게 대령했더니 아이가 쏟아낸 한마디. "아빠는 셰프로서 기본이 안되었어. 야채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를 생각해서 만들어야지. 내가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이렇게 잔뜩 야채를 넣으면 먹을 수 있겠어?!".
늘 야채를 잘게 썰어 아이가 느끼지 못하도록 식감을 최소화했는데 그날은 그와의 통화 탓일까. 밥만큼이나 야채를 넣어 씹히는 식감과 입 속 터지는 상큼을 아이에게 선물하고 싶어 깜빡했다. 아니 반밖에 먹지 못했지만 반이라도 먹어줘서 고마웠다. 앞으론 더 보이지 않게 위장해 아이의 건강을 생각해야지. 다짐도 했다.
그가 알려준 두 가지 지혜, 일과 삶의 분리, 그리고 야채와 과일의 습관. 쉽지만 쉽지만은 않은 두 가지다. 여전히 일과 삶을 분리했다고 떠들고 다니지만 실상 주말에도 일을 생각하며 메모를 놓치지 않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미 받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만다. 건강한 한 끼를 놓치는 경우도 많다. 술에 나를 맡기고 장렬히 전사하는 날도 더러 있다.
아내와 아이를 위해 또한 나를 위해 더 건강해야 한다고 늘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늘 놓치고 사는 게 일상이지만 순간순간 리마인드 해야겠다.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그 누구도 대신 아파해 줄 수 없기에. 오롯이 그 순간들이 나만의 순간이기에. 더욱 조심하고 관리하고 소중히 아껴야 할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