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비가 내린 밤이었다. 절대 미룰 수 없는 행사였고 협찬사로서 꼭 현장을 확인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휴일에 그것도 먼 곳이었지만 부득이 참석하게 되었다. VIP가 아닌 일반석으로 좌석을 받았고 좌석권을 겨우 받아 입장 대기줄에 섰다. 200미터는 되어 보이는 줄에 겨우겨우 줄을 서 그 비 오는 밤에 1시간 반을 다시 기다린 후 흡사 난민이 된 느낌으로 겨우 입장했다.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야외 공연장에 바닥은 잔디와 흙탕물로 엉망이었고 배정받은 지정좌석을 겨우 찾아갔지만 촬영 장비를 이유로 한참 뒤로 의자를 빼놓았다. 좌석은 아무렇게나 배치되어 한참을 찾아 겨우 앉았다. 행사가 시작되고 빗방울은 더욱 굵어졌고 우비를 입되 우산은 쓰지 못하도록 했다. 온몸이 비에 젖고 신발 역시 물속에 풍덩 빠진 채로 공연을 보다 3시간 녹화지만 1시간도 겨우 채우지 못한 채 집으로 향했다.
저체온증으로 병원에 실려갈 위기였던 순간이다. 대중교통으로 갔던 터라 겨우 걸어 나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정신을 놓아버릴 뻔했던 아찔함을 잊을 수 없다. 집으로 도착해 만신창이가 된 채로 겨우 샤워를 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외출을 위한 채비를 하던 중 반지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무려 티파니 반지를. 전날 재난에 가까운 상황을 겪고 멘탈이 나간 채로 반지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늘 반지를 두는 곳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로도 또다시 멘탈이 나가버렸다.
긴 연휴의 시작을 이렇게 망칠 것인가. 두려움이 엄습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겠다는 오전 일정을 포기한 채 집을 샅샅이 뒤졌다. 모든 동선을 고려해도 도무지 반지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아들의 학원 셔틀을 겨우 마치고 점심 역시 먹는 둥 마는 둥 온통 마음은 사라진 반지에 가있었다. 저녁 약속에서조차 반지를 생각해서는 안되었기에 몇 번이나 마음을 다독였다. 어딘가엔 있을 거야. 찾지 못할 뿐이지. 그깟 반지 없어도 되는 거지. 그래놓고 돌아서면 반지 생각에 괴로웠다.
휴일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에게도 괜히 짜증이 났다. 그렇게 힘들게 돌아온 어제의 나를 조금이라도 챙겨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에. 오히려 그런 내게 더 화가 나는 그런 순간. 약속 전까지 도무지 책도 손엘 잡히지 않아 결국 사우나를 다녀왔다. 아내와 같이 어제 집으로 돌아온 상황을 하나씩 되짚자며 첫 번째 순서가 바로 욕실로 직행해 욕실 입구에서 옷을 벗으며 휴대폰과 반지를 뺐던 기억이 났다. 그 순간 아내는 욕실 입구의 체중계를 들어 올렸다.
유레카! 체중계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반지를 발견했다. 일순 감탄사가 쏟아졌다. 반지는 원래 자리를 찾아갔고 기억의 부재에 괴로웠던 시간들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잃은 순간, 찾은 순간, 종이 한 장의 차이가 집착과 아집, 옥죄는 괴로운 상황을 한방에 해결해 주었다. 그깟 반지 하나에 나는 그토록 괴로웠던 걸까. 애꿎은 MBTI 탓을 하며 자책했다. 저녁 약속, 평소보다 더 업된 텐션으로 함께하며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금값. 그거였구나. 집착과 아집의 원인이. 돌아서 생각하니 속좁고 옹졸하면서도 대범하지 못했던 내가 보였다. 덕분에 남은 연휴, 심지어 내일 떠날 제주도 여행까지 큰 마음의 걸림돌 없이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 드는 생각이, 지금도 앞으로도 이런 우발적이고도 돌발적인 상황들이 닥칠 텐데 그때마다 이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며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을 것인가.
그깟 반지 하나가 내게 지금 살아가는 마음 자세를 선물해 주었다. 좀 더 침착하게 좀 더 대범하게 좀 더 나와 아내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의 사이즈를 키우자는 가르침. 더 큰걸 잃어버릴 걸 이걸로 때운 거구나 긍정의 파이를 키우라는 가르침. 남은 연휴를 더 뜻깊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그깟 반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