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편지
멀리 있지만 항상 곁을 지키는 그대에게,
농사를 짓지 않았더라면 평생 꽃처럼 아름다운 것만 좇아 살았을 지도 모르겠어요.
꽃집의 꽃들은 물론이고 어느 집 담장위로 꽃이 얼굴을 삐죽 내밀고 있으면 그 아름다운 자태에 훅 마음을 빼앗겨 눈길이 저절로 멈춰버리지요.
그순간, 가던 길을 슬몃 잊어버리는 것은 예사고요.
봄여름가을까지 피어나는 꽃으로 사계절은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아니 겨울에도 눈꽃을 만날 수 있어 서늘한 아름다움에 취할 수도 있군요)
어디 그뿐인가요.
밭에서 만나는 들깨꽃, 참깨꽃, 감자꽃, 부추꽃에 호박꽃까지 일일이 헤아리기도 벅찰 지경입니다.떼어놓을 수 없는 먹거리, 쌀에도 벼꽃이 따로 있고요.
밭작물의 꽃들도 오목조목 들여다보면 모두 이쁜 구석이 저마다 새록새록 있습니다.
그리 다채로운 꽃과 꽃 사이, 꽃길을 거닐다보면 한 해가 훌쩍 훌쩍 지나버리기도 하였습니다.
밭이나 논이나 할 것 없이 농부는 한해내내 풀과의 전쟁을 치릅니다.
물을 가둬놓고 키워야 하는 논에도 벼외의 잡풀이 수북하게 돋아나는 일은 흔합니다.
농부들이 봄에 모내기를 하고 어린 풀을 일일이 뽑아내버려야 하는 수고로움은 기본이고요.
아예 방제를 하여 물속에 풀이 자라지 못하도록 흙을 관리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스물스물 올라오는 풀, 논과 밭을 가릴게 없습니다.
비가 내리고 나면 더욱 맹렬하게 기어오르듯 농작물을 젖혀놓고 풀이 무성하게 일어서는 꼴을 맞닥뜨리곤 합니다.
올해 가을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잦은 날씨에 더욱 풀들은 기운을 뻗치는 모양새입니다.
오죽하면 평생 농사꾼, 팔순엄마의 손목은 통증으로 이미 풀과의 싸움에서 진 지 오래입니다.
농부에게 풀과의 싸움은 이미 지고 시작하는 게임입니다.
왜냐하면 풀은 날씨따위에 결코 지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8월 펄펄 끓는 무더위에도 12월 꽁꽁 얼어붙는 추위에도 그 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고 버텨냅니다.
농부의 성실함으로 방제하거나 어린 풀을 하염없이 뽑아낸다해도 그 때 뿐입니다.
어느 틈에 바람타고 풀씨가 날아왔는지 흙속에 깊이 깊이 숨었다가 솟았는지 새로운 풀들은 영락없이 돋아오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살면서 가장 질긴 생명력을 지닌 게 바로 풀 아닐까요.
풀같이 주변환경을 탓하지 않고 뿌리를 내리는 생명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살뜰하게 가꾸기는 커녕 박대와 멸시를 아무리 받아도 거침없이 솟아나는 무한의 힘을 풀은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혼탁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우선 탓하고, 제 눈에 미치지 못하는 부모를 탓하고, 그러다 제 자신까지 싸잡아 탓하는 것을 경계하고 싶습니다.
풀이 온 몸을 던져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이렇게도 산다.
어떻게해도 살아남는다 '하면서요.
아름다운 꽃 한송이, 화려한 한 순간으로 피었다가 지고 말 것이 아니라 세상 어느 틈바구니에서든 불쑥 제 뿌리를 내리고 마는 풀로 살아가면 어떠랴.
비잦은 이 가을에, 글쓰는 농부는 풀에게 들리지 않은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습니다.
'풀처럼 단단한 사람이 되어라'
기름지고 볕좋은 땅이냐에 목매지 말고 지금 서 있는 그자리에서 질기게 굳세게 살아남아줄것을요.
진심에 진심으로.
다음 주 토요일, 제 편지를 오늘처럼 기다려 주실 테지요.
나와 그대의 5 퍼센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