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여덟 엄마, 손글씨는 흔들흔들

시골이야기

by 심풀

여든여덟 엄마, 반까막눈이십니다.

글씨는 읽을 수 있는데 쓰는 글자는 당신 이름 석자뿐입니다.

이름한번 쓰려면 그림을 그리듯이 한자 한자 진땀을 흘리면서 애를 써야 하는 형편입니다.

남앞에서는 긴장을 하시는 통에 평소보다 주체할 수 없이 비뚤빼뚤 글씨가 제 칸을 위아래로 넘쳐가고 맙니다.

하여 대필이 가능하다면 종종 엄마를 대신하여 서명을 해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주로 면사무소나 농협 등에서요.


image.png 여든 여덟 엄마 글씨☆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YWCA 노인 일자리 사업 알바를 다니고 계십니다.

한 달에 열 번정도 동네에서 종이박스 접는 일에 이십얼마의 수고비를 받으시는데 그 맛에 홈뻑 빠지셨습니다.

"이르키 쉬운 일이 세상에 워디 있다냐!

암만이구 시켜주믄 하고 싶은디,

내가 젤로 나이가 많드라."

따박따박 월급을 받는 재미에 허리에 파스를 덕지덕지 바르고도 흥겨워하십니다.

"뭐를 쓰라는 디,

내 이름 말이여,

니 글씨루 제일 못나게 써주믄 워떠?"

어려운 일이 아닌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 자리에서 엄마를 대신하여 자필서명을 하였드랬습니다.

그후, 며칠이 지나고 엄마가 울상이 되어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아이쿠야, 도루묵이여.

그걸 알아보드라, 누가 써줬냐고 하는 디 막내딸이 써줬슈했지뭐냐.

다시 써오랴. 나 글씨 연습 하야햐."


엄마는 마음이 급한 지 숫자가 접시만큼 큰 달력을 부욱 찢더니 뒷면에 글씨 연습을 시작하셨습니다.

"막내야! 얼릉 와봐, 니가 봐줘야징, 나 혼자 못햐."

A4 한장, 열개의 칸칸마다 일한 날짜와 이름을 써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월별로 근로기록을 해놓는 서류였습니다.

"거기서 쓰라는 디 아니라구 집이 가서 써가지구 온다구 도망쳐왔구만.

워메, 사람 눈이 월매나 따가운 디, 근디 어뜨케 쓰믄 되는 겨?"

이름만 쓰면 되는 줄 알았더니 숫자!

복병이 있더군요.

위의 사진처럼 9를 그려놓는데 스물스물 지렁이가 기어가듯이 발발 떨면서 그려놓으셨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그대로 천천히 그려볼 테니 함께 해보셔요."

머리를 맞대고 숫자를 그리는 엄마곁에서 말을 덧붙여주다가 나중엔 아예 엄마손에 손을 살짝 얹고 직접 숫자 9을 써드렸습니다.

"자, 이제 혼자 한 번 해보셔요."

'숫자9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구나'

여든여덟살 아이가 되어 숫자 그리는 엄마였습니다.

그곁에서 빙긋이 웃음지으며 영락없이 콩나물대가리 모양의 9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위의 사진을 함께 올려보았답니다)

"아이쿠야! 너무 크게 썼나벼? 글자 쓸 칸이 모자라는디?"

근심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엄마모습이 사뭇 천진하기까지 하였답니다.

" 밖으로 조금 삐져 나와도 괜찮으니 그냥 이어 쓰셔요."

누가 뭐라 할일 없겠지싶어 사이사이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용기를 듬뿍 드렸고요.

"요거! 요거 잘 쓰셨네요."

아낌없이 칭찬을 건네며 숫자쓰는 아니 그리는 엄마를 응원해드렸습니다.

"그려냐? 괜찮은겨?"

"여든여덟살에 이만큼 쓸 줄 아는 게 어디 쉬워요. 잘 쓰셨어요."

엄마는 어물어물 진땀을 흘려가면서 느릿느릿 칸마다 당신의 이름을 채워넣으셨습니다.

명필이 아니면, 아름다운 글씨가 아니면 또 어떠랴.

엄마이름 석자, 당신손으로 쓸 수 있으니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일이지요.

진심에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효행은 쉬우나


부모를 사랑하는 효행은 어렵다.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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