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심장, 한라산을 오르다

2026년 4월 한라산 등반기

by hesed by

# 한라산,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는 곳


한라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었지만, 중년을 넘어서도록 그 실체를 밟아 본 적이 없었다. 제주도의 매력에 빠져 한라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지방도를 수도 없이 지나다녔건만 정작 제주를 대표하는 한라산을 올라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작된 한라산 등반 계획! 더 이상 늦어져 체력적 이슈가 발생하기 전에 두 다리로 당당히 밟아 보리라는 당찬 각오와 함께 나의 한라산 등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라(漢拏)의 명칭은 '은하수를 손으로 잡아당길 수 있을 만큼 높은 산'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알다시피 화산 활동에 의해 지표의 대부분이 현무암으로 덮여 있으며, 한라산을 중심으로 한 오름이 368개, 한라산에 자라는 식물이 약 2,000여 종 그리고 한라산 특산종만 해도 70종이나 된다고 하니 그야말로 놀라운 자연의 보고이다. 과연 내가 이중에 몇 개의 종이나 볼 수 있을지, 과연 분간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라산을 둘러싼 신비로운 자태만으로도 나의 맘은 충분히 설레고 있었다.



# 생각보다 완만한, 때론 생각보다 힘든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에 이르는 등반 코스는 두 가지가 대표적인데, 바로 성판악 코스관음사 코스이다. 나는 성판악 코스를 선택하였는데, 이유는 단지 "생각보다 완만한 코스"라는 인터넷 정보에 이끌린 탓이다. 비록 관음사 코스에 비해 거리도 길고 등반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달콤한 유혹에 성판악 코스를 택한 것이다. 추가로 나에게 주어진 정보는 거리 9.6km! 왕복 소요시간 약 9시간이라는 개략적인 내용이었는데, 9시간의 등반이 어느 정도인지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오직 초보자에게 적합하다는 말을 믿고 덤벼든 것이 첫 번째 패착이다. 그리고 또 다른 나의 패착은 "생각보다"라는 기준이 과연 누구의 기준인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차 소개하겠지만 결론적으로 나에겐 "생각보다 힘든" 코스였다. 뭐 힘겨운 등반을 상쇄할 만한 풍경과 감동이 있었으니 후회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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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성판악 탐방로 안내도]


# 변덕스러운 제주도


한라산 등반의 시작은 '탐방 예약'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루에 허용되는 입산 인원이 제한되어 있는 탓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데, 홈페이지나 앱을 통해 쉽게 예약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단, 성수기에는 조기 마감 될 수 있으니 서둘러 예약하는 것을 권장드린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 밖에 예약이 안되니 탐방 날짜 선택에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렇게 탐방예약을 마치고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도 확보한 나는 설렘과 긴장 속에서 제주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혹여나 하는 심정으로 날씨 정보를 찾아봤는데, 내가 예약한 등반일에 구름과 비를 나타내는 표시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도 첫 한라산 등반인데 하는 아쉬움에 다음 날의 날씨를 보니 맑음이었다. 나는 잽 싸게 기존 예약을 취소하고 다음날로 예약을 변경하였다. 다행히 성수기가 아니라 인원수에 여유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등반일정이 하루 미뤄진 탓에 나는 한라산 등반 뒤에 돌아보려고 했던 제주의 숨은 명소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다음날 등반이 걱정되어 몇 군데만 돌아보려 했지만 호기심 어린 나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고, 저녁에 숙소에 돌아와 보니 무려 3만보를 넘게 걸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다행히 두 다리에는 그리 무리가 가지는 않았는지 상태가 괜찮아 보였지만, 어쨌든 최대한 다리를 풀어주고 잠을 청하며 다음날 한라산 등반을 기약했다.



# 새벽의 아우성


앞서도 언급했듯이 한라산 성판악 탐방코스는 대략 왕복 9시간이 소요된다. 긴 등반 시간 탓에 사람들은 대부분 아침 일찍 출발한다. 성판악 주차장이 협소하여 금방 들어찬다는 정보를 입수한 나 역시, 조금 일찍 가서 차를 주차하고 동이 트자마자 등반을 시작하리라 생각하며, 새벽 5시 반경 차를 몰고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이른 새벽부터 주차장은 이미 북적북적 이고 있었다. 다행히도 주차 자리가 간신히 남아 있어 차를 주차시키긴 했지만,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둠 속에 등반을 시작하는 이들을 바라보니, 참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의 산 사랑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올라가 봐야 길도 잘 보이지 않을 듯했고, 밝아오는 아침 햇살 속에서 기분 좋게 산길을 걷고 싶어 잠시 차에서 휴식을 취하며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나는 화들짝 잠에서 깨었다. 새벽 운전과 전날의 강행군? 탓에 꽤나 피곤했었나 보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 30분. 다행히 이제서야 주변은 밝아오고 있었고, 거의 한 시간을 잠들어 있던 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 신비로운 산행의 시작


한라산 등반은 탐방소의 입구 게이트에서 QR 코드를 찍고 차단바를 열어젖히며 시작된다. 마치 마라톤을 시작하듯이 등반 시간의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는 것이다. 반드시 신분증 및 QR 코드를 준비하라는 LED 경고등이 반짝이는 성판악 탐방로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자니, 각양각색의 등산복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결의를 다지는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나 역시 행여나 등산화 끈이 풀어질까 이미 잔뜩 조여맨 끈을 또다시 고쳐 매며 결의를 다진 후 한라산의 청량하고도 신비로운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며 힘찬 첫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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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판악 탐방로 입구 게이트]


# 화산암의 심술


부푼 기대를 안고 게이트를 출발한 나를 먼저 반겨주는 것은 탐방로 주변의 낯선 초목들과 부드럽게 굽이치는 오솔길이었다. 이들은 전날의 물기를 머금은 싱그러운 아침 햇살과 어우러져 빛나는 4월을 선보이고 있었는데, 한라산 고유의 식생이 빚어낸 자태가 아침 이른 숨결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초반의 산행길은 비교적 가볍고 즐거웠는데, 전날의 고행에 비해 몸도 생각보다 가벼웠고 야자수 매트와 목재 데크가 번갈아 가며 깔려 있어 걷기에 편했으며 경사도 그리 급하지 않아, 뭐 이만하면 9시간 잘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저절로 기운이 났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착각이었음이 얼마 안 가 드러나고 말았으니, 한라산의 등반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주변의 나무들과 숲과 싱그러운 공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했지만, 문제는 등산로의 바닥이었다. 흔히 등산하면 흙길이나 데크길을 걷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여기저기 울쑥불쑥 튀어나와 있는 화산암들에 당황해 마지않았다. 한라산의 화산암 길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 산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하산길이 문제였는데, 등산로 여기저기 박혀 심술을 내고 있는 화산암들에 내 발목은 연신 고통에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 역시 한라산의 일부인데 어찌하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한라산 그 자체를 느끼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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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로 초입의 숲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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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화산암 길(좌) / 등산로 주변의 이끼 돌담(우)]



# 성판악, 너는 어디 있느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라산에 오면 '성판악'이라는 지명을 무수히도 들었건만, 정작 나는 '성판악'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내게 성판악은 그냥 주차장과 등산코스의 지명일 뿐이었다. 도대체 성판악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생겼을까?


우선 성판악이라는 이름은 '성벽처럼 둘러쳐진 널빤지 모양의 산'이라는 뜻이다. 성(城): 재성 (성벽), 판(板): 널빤지 판 (나무판자처럼 깎아지른 듯한 바위)' 악(岳): 큰 산 악 (제주에서는 주로 오름을 뜻함)의 한자로 이루어진 이름인데, 제주 현지에서는 '성널오름'이라고 더 많이 불리운다고 한다. 오름 중턱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수직 암벽이 마치 성벽에 널빤지를 세워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판악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대체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알기 위해 열심히 검색엔진을 못살게 굴었건만, 그 누구도 정확한 답을 해주지 않아 여전히 나는 성판악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나에겐 여전히 주차장이요 등산코스에 붙은 별칭으로만 남아있다. 단지 검색을 통해 알아낸 그나마 가장 상세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성판악은 한라산 국립공원의 성판악 등산로 주변에 위치하는 오름으로 한라산 동쪽 산록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단성화산이다. 단성화산은 일회의 분화 활동을 통해 형성되는 소형 화산체로서 제주에서는 오름으로 불린다. 성판악이라는 명칭은 산 중턱에 암벽이 널 모양으로 둘려 있는 것이 성벽처럼 보여 성널오름 또는 한자어로 성판악이라고 하게 됐다. 성판악은 전체가 삼림으로 덮여있으며 주변으로 성널계곡 등 크고 깊은 계곡이 발달해 있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5·16 도로의 중간 지점 가장 높은 곳에 성판악 휴게소가 있는데, 이곳은 한라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중이 하나로 성판악이 시작되는 곳이다."


아! 성판악! 암벽이 널처럼 펼쳐진 오름. 너는 어디 있느냐?



# 속밭, 삼나무 밭의 휴식


성판악 탐방소의 입구를 출발해 약 1시간 반 정도를 올라가다 점차 숨이 가빠지기 시작할 무렵, 한라산의 첫 번째 대피소를 만나는데 이름도 희한한 '속밭' 대피소이다. '속밭'은 1970년대 이전까지는 넓은 초원지대였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이 우마를 방목하며 목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삼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져 예전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속밭'의 '속''삼나무'를 뜻하는 제주 옛말로, 속밭은 '삼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밭'을 의미한다. 현재 속밭 대피소 주변은 삼나무뿐만 아니라 굴거리나무 등 식생이 매우 풍부하고 잠시 쉬어가기에는 제격이다.


한라산은 화장실이 귀한 탓에 가급적 대피소마다 들러 휴식을 취하며 급한 용무도 해결하는 편이 좋다. 속밭 휴게소에는 실내 대피소도 있지만, 공간이 협소한 탓에 일반적으로 앉을자리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너무 추운 날씨만 아니라면 야외 벤치들이 제격이어서 나 역시 서둘러 한자리 맡아 앉아 잠시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한라산을 등반할 때 일반적으로 1.5리터의 물과 간식을 권장하는데, 생각보다 간식이 많이 필요하다. 체력 소모가 심한 탓에 몸에서 쉴 새 없이 에너지를 요구하는 탓이다. 나는 가방에서 얼른 전날 구입한 오이를 꺼내어 몸의 수분을 채워나가며 전열을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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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오름, 너무 먼 당신 다음에 봅시다


속밭 대피소를 지나 또 그렇게 뚜벅뚜벅 산을 오르다 보면 사람들의 말소리가 점점 사라진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덧 산행을 시작한 지 2시간이 넘어가며, 사람들의 호흡은 턱에 차오르고 얼굴은 벌겋게 상기된 탓에 말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쯤에 등장하는 안내판 하나가 보이는데, '사라오름 전망대'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뭐 아직 체력이 바닥은 아닌지라 한번 들러볼까 하는 마음으로 안내판을 살펴보지만, 이내 '왕복 40분'이라는 선명한 글씨가 내 마음을 가로막는다. 갈길이 구만리인데 사라오름은 나중을 기약하기로 하고 서둘러 마음을 고쳐 먹으며, 다시금 한라산 정상을 향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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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오름 입구 안내판(좌) / 해발 1400m 표지석(우)]



# 진달래밭 대피소, 정상을 향한 마지막 준비


한라산 성판악 탐방로에는 2개의 대피소가 있다. 이제 2번째이자 마지막인 '진달래밭 대피소'가 보인다. 첫 번째 만난 '속밭 대피소'에 비해 규모가 꽤 크다. 그리고 이곳은 한라산 성판악 코스 해발 1,500m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정상인 백록담에 오르기 전 마지막 대피소로 등반객들에게는 마지막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날씨를 체크하는 중요한 장소이니 반드시 들러가야 한다.


이곳 대피소 인근에는 아마도 '털진달래와 산철쭉'이 많이 피는 듯하다. 휴게소 안내판에는 분홍색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 사진과 함께 설명이 곁들여 있지만, 아직 4월이라 그런지 꽃들의 향연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한라산은 그 계절마다의 독특한 분위기와 매력으로 찾는 이들을 설레이게 하니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정상의 위용이 나를 더욱 설레이게 만들었다.


참고로 아직 한라산 등반 경험이 없는 분들을 위하여 몇 가지 유의사항을 전해드리면, 먼저 까마귀를 조심해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대피소에서 휴식을 취하며 잠시 간식이라도 먹을라치면, 덩치 꽤나 하는 까마귀가 음식을 노리며 달려든다. 일찍 눈치챈 나는 다행히 봉변을 모면했지만, 저 멀리 한구석에 등반객 한 명이 화들짝 놀래며 간식을 숨기는 모습을 보기 그 까마귀는 상습범인 듯하다.


한 가지 더 유의사항은 화장실에 손 씻는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속밭 대피소'도 동일한데, 물을 공급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보니. 대피소에도 최소한의 물만 공급되며, 손을 씻는 사치 따위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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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밭 대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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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까마귀(좌) / 제주 전통미를 살린 화장실(우)]



# 모노레일, 사람은 탑승 불가!


한라산 성판악 탐방로를 오르는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외줄기 레일이 눈에 띄었다. 뭔가를 이동하는 모노레일처럼 보였는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보니 일반 관광용이 아닌, 등산로 보수 자재나 대피소의 쓰레기 등을 운반하기 위해 설치된 화물 운송용 모노레일이었다. 설치하는 동안 여러 사람의 땀과 고생이 눈에 선하지만, 설치해 놓은 모양새를 보니 지금은 상당히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혹시나 모를 긴급 상황(부상 등) 발생 시나 대피용으로도 제한적으로 활용된다고 하니, 그 요긴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일반 관광객의 탑승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나의 장난기 어린 마음속에는, 혹시나 하신길에 부상등의 이유로 등반이 어려워 모노레일을 얻어 타고 내려온 사람이 실제로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휴식을 취할 겸 검색을 해보니 누군가 떡하니 자신의 경험담을 올려놓은 것이 아닌가? 정말로 긴급 시는 사람도 이용이 가능한 듯하다. 나 역시 한번 타보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그냥 자신의 하체를 혹사시키시라! 애당초 그럴 목적으로 산을 오르지 않았는가!


잠시 소소한 감상을 뒤로하며 나는 혹여나 부상등의 이유로 저 모노레일에 의지하여 하산하는 일이 없길 기원하며, 다시 발검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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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로 옆 모노레일]


# 계단 지옥, 고마운 선물이 되다!


진달래밭 대피소를 출발하면 이내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길은 점차 사라지고 끝없는 계단 지옥이 시작된다. 어치피 화산암 바닥이나 계단 지옥이나 힘들긴 매한가지이지만, 저 멀리 아득한 정상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진달래밭 대피소를 떠나온 이상 다른 방법은 없다. 그냥 정상을 향해 꾸역꾸역 전진하는 수 밖에는!


산 위에 만들어진 이런 계단이나 데크를 오를 때마다 드는 생각이 한 가지 있다. 도대체 누가? 언제? 어떻게? 얼마의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이 험난한 산에 마법의 융탄자와 같은 이 길을 깔았는가? 만약 이런 계단이나 데트라도 없었다면 우린 원시인처럼 바위와 나무 뿌래기를 부여잡고 몇 번이나 산등성이를 미끄러져 내리며 힘겨운 산행을 해야 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계단 지옥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마운 선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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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도 올라도 끝이 나지 않는 계단들]


# 구상나무의 위로


그래도 힘들 긴 힘든가 보다.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고 있자니, 처음에 가졌던 고마운 생각도 정상을 향한 의지도 한풀 꺾이고 말았다. 남은 것은 거친 숨소리와 벌거게 상기된 얼굴과 나도 모르게 '아이고'하며 내뱉는 외마디 비명뿐이었다.


그때즈음인가? 힘겨운 계단 지옥 옆으로 장대한 구상나무 군락지가 펼쳐졌다. 마치 죽은 영혼들의 거대한 무덤처럼 잿빛의 구상나무가 4월의 초록과 한데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해발 1400m 이상의 고산지대에만 산다는 구상나무! 일순간 경이로운 풍경은 나의 발검음을 잠시 멈추게 했고, 단지 내 발끝만 쳐다보며 걸어가던 나의 시선을 경이로운 한라산의 풍경으로 돌려세웠다. 구상나무 군락지와 한라산 정상부근의 비범한 고지대 식생 군락은 나의 마음을 위로하며 마지막 의지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었다.


구상나무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구상나무는 한라산 고지대를 대표하는 한국 특산 식물인데, 안타까운 것은 멸종위기종이라는 사실이다. 구상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로도 유명하고, 겨울철 눈 덮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지만. 기후 변화로 인해 집단 고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마치 죽은 영혼들의 거대한 무덤처럼 느껴졌던 구상나무 군락지의 감상은, 단지 느낌이 아닌 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구상나무의 멸종이 먼 미래로 미루어져, 아니 멸종위기로부터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져 먼 미래의 등반객들에게도 그 위로를 전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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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고산지대의 구상나무 군락]


# 한라산의 바람, 이름값을 하는구나!


한라산의 정상이 가까울수록 진하게 나를 맞아주는 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한라산의 바람인데, 그 위세가 사뭇 대단하다. 한라산 저 아래의 일상은 4월의 맑고 온화한 날씨로 부드러운 봄의 융탄자가 깔려 있지만, 이곳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태양은 더욱 가까이 비추며 뜨거운 열기를 전하곤 했지만, 갑자기 불어대는 한라산의 바람은 태양빛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매서운 한기를 몰아붙였다. 오죽하면 곳곳에 아직도 얼음이 녹지 않은 곳도 종종 눈에 띄었다. 제대로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의 바람은 다시 한번 한라산의 비범함을 느끼게 해 주었고,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 가고 있는 나무와 풀들을 향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게 만들었다. 한라산을 등반할 때 왜 반드시 바람막이나 여러 겹의 옷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짐작케 해주는 바람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잠시 바람을 피해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 있을 때쯤, 갑자기 나의 감상들을 무색게 하는 이방인들이 등장했다. 한라산에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온다. 내 짐작에는 거의 30~40%는 외국인 등반객인 듯하다. 이토록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지만, 내 앞을 지나가는 두 명의 백인 커플은 놀랍게도 민소매 티에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대부분의 등산객이 4월임에도 불구하고 준비해 온 여벌의 옷들을 최대한 끼어 입으며 옷깃을 잔뜩 여미고 있는데, 반해 이들의 차림은 그야말로 한여름 바닷가였다.


그들은 유럽인으로 보였는데, 나는 한번 질문해보고 싶었다. 정말로 추위에 강해서 그렇게 입고 왔는지? 아니면 한라산의 매서운 바람을 예상하지 못한 채 추위에 떨고 있지만 괜찮은 척하는 건지? 둘 중 무엇이 사실이 든 간에, 이 놀라운 유럽 커플은 힘차게 나의 앞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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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고산지대의 풍광들]


# 드디어 백록담


이제 손에 잡힐 듯 정상이 보인다. 아직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저 마지막 계단 너머에 꿈에 그리던 '백록담'이 떡하니 펼쳐지리라! 잔뜩 부푼 기대를 앉고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 마지막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이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이게 웬일인가?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긴 행렬이었다. 한라산 정상에 이리도 사람이 많다니!


알고 보니 긴 줄의 정체는 백록담 표지석에서 인증 사진을 찍기 위한 대기줄이었다. 아마 예전에는 백록담 표지석에서 찍은 인증 사진이 있어야 등반인증서가 발급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상에서 울려 퍼지는 안내방송에서는 백록담 인근 아무 데서나 찍어도 인증이 가능하다며, 연신 안내 멘트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긴 정체구간을 해소하기 위해 관리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표지석 인증 사진을 위한 대기줄은 점차 길어져만 갔다. 뭐 정상에 올랐으니 떡하니 백록담이라고 쓰인 표지석 옆에서 자랑스러운 인증 사진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야 모두가 품을 수 있지 않겠냐마는, 대기 상태를 보니 족히 1시간은 기다려야 할 듯했다. 순간 나는 빠른 포기를 결정하고, 긴 대기줄을 벗어나 백록담의 실체를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십 미터 정도를 더 올라오자 드디어 백록담이 숨겨둔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백록담이다. 아직 이른 봄의 계절 특성상 TV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등장하는 푸른빛의 백록담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매력적이고 신비로운 자태였다. 나는 최대한 여유롭게 그 풍광을 마음에 담으려 했다. 그 먼 옛날 거대한 용암과 연기를 뿜어내던 이곳! 그 위용과 장엄함을 기억하기 위해 나의 시선은 바쁘게 백록담의 자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백록담 정상에 서 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태풍과도 같은 거센 바람이 온몸을 강타하며 옷 밖으로 노출된 나의 모든 피부를 얼어붙게 만들기 때문인데, 사람들이 왜 풍광이 가장 좋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저 아래 표지석에 몰려있는지 이해가 갈 만도 했다. 그렇게 버티기를 십여분. 이제 한계에 다다른 나는 비교적 바람을 피해 볼 수 있는 정상 부근 바위 밑을 찾아 안정을 찾아본다. 짧은 만남을 허락한 백록담! 또 다른 계절 또 다른 시간 다신 한번 만남을 기약해 본다.


KakaoTalk_20260420_220205279_22.jpg [백록담 전경]



# 제주의 풍광들, 아쉬움을 달래다


한라산 등반 이야기는 끝이 났다. 하지만 한라산 등반일 전후로 돌아다녔던 제주 곳곳의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부록처럼 남겨본다. 내륙의 이방인들에게 제주는 늘 갈 때마다 새롭다. 내륙의 땅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아름다움 자연을 사진에 모두 담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제주의 풍광들은 한라산 등반의 아쉬움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감동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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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아름다운 풍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