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며칠 전 친구에게서 문자가 한통 날라 왔다. 어려서부터 친한 녀석인데 문자의 내용인즉슨, 내 추천을 받고 '나의 아저씨'를 보고 있는데, 시리즈 중간까지 봤는데도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재미있다는 건지 자신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잔잔하고 소소한 감동 따위에는 둔감한 녀석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두 번이나 정주행 한 나로서는 살짝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별로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아저씨'라는 작품이 뭔가 눈에 확 띄는 재미를 지녔다거나 혹은 긴장감 넘치고 압도적인 장면이 연출되는 작품이 아니기에 한 단어로 작품을 특징짓기에는 다소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부류의 작품은 사실 개인의 성향을 많이 탄다. 영상 매체를 통하여 뭔가 정확한 전달 포인트, 예를 들어 화끈한 액션이나 긴장 넘치는 스릴러를 원하는 사람에는 다소 밋밋한 작품일 수도 있고, 평범한 일상 속의 감동을 추구하는 누군가에게는 그 잔잔함이 또 다른 묵직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물론 나는 후자의 성향을 지녔다. 그렇기에 이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던, 친구의 문자 한 통이 나의 감각을 깨워 꽤나 오래전에 보았던 '나의 아저씨'의 대사들을 떠올리게 하였고 오늘 이 시간 그 감동을 정리해 보려 한다.
참고로 나의 아저씨의 작가는 '박해영'작가이다. '나의 해방일지'의 작가이기도 한데, 히트작들을 보니 작가의 성향이 엿보인다. 이 글을 빌려, 평범한 사물과 진부 한듯한 인간관계를 진지한 고민으로 바라보며 많은 감동 있는 대사들 창작해 낸 작가에게 감사한다. 그럼 이제부터 주요 명대사들에 대한 나의 개인적 감상과 소회를 적어보겠다.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 주잖아.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게 보여, 그래서 불쌍해.
극 중 고집불통의 직장 상사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계약직 사원 이지안(아이유)을 향해 박동훈 부장(이선균)이 건네는 대사이다.
"경직되다"라는 뜻의 사전적 의미는 "사고방식, 태도, 분위기 따위가 부드럽지 못하여 융통성이 없고 엄격하게 되다"라는 뜻이다. 대부분 어른들의 기억을 되짚어가 보면, 자신이 가난했건 부자였던 간에, 어린 시절은 대부분 행복하고 겨운 기억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 기억들은 매우 유쾌하고 기분 좋게 다가온다. 물론 극심한 가난이나 장애, 가족 간의 불화로 어린 시절이 악몽으로 얼룩진 불행한 인생을 살아오신 분들도 많다. 그분들은 그들 나름대로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있을 터이다. 그러나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어린 시절의 유쾌한 기억들은 평균적인 삶을 살아온 보통의 사람들의 경우이다.
방금 예를 든 것과 같이 아주 불우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아이들은 이유 없이 웃고 떠들고 행복해한다. 게다가 어른들과 비교해 본다면 매우 융통성 있고 너그럽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여 때론 욕심을 부리거나 투정을 부리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확실히 베푼다. 행여나 자신의 것을 빼앗기거나 자신의 생각이 무시당해도 곧 잊어버리고 다시금 행복한 현실에 충실한다. 어른과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누구의 잘잘못을 교묘히 정죄하고 비판하지도 않고 그리 엄격하지도 않다. 차라리 대놓고 불만을 표현하거나 자주 싸우기도 하고 울고 때 쓰기도 하지만, 속으로 숨기며 서로를 비난하거나 정죄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드러나는 모습이 전부이고 미움과 증오가 오래가지도 않아서, 싸웠던 아이들도 곧잘 다시 친구가 되곤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어른이 될수록 '경직'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인간이 되어가는 것일까? 어른이 될수록 사고방식과 태도는 딱딱해지고 상대방에게 엄격한 비판의 날을 세워가며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기 일쑤이다. 그리고 그 앙금은 왜 이리 오래가는지 쪼잔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비근한 예로, 최근의 정치권 이슈나 사회현상을 돌아보면, 어른이 될수록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 외에 다른 것에는 전혀 융통성을 잃어버리고, 철옹성과 같은 자기 세계에 갇혀 경직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이만 들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가장 가슴 아픈 현실은, 어른이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저지르고 있는 잔혹행위다. 그들은 자신의 경직된 삶의 방식과 편협한 생각의 칼날이 다른 경쟁자들에게 잘 먹히지 않을 때면, 그 칼날을 약자, 특히 여성이나 청소년, 어린아이들에게 겨눈다. 그리고 그들의 경직되어진 사고, 편협한 생각과 날카로운 언행의 칼날이 아이들에게 주는 아픔은, 그것을 아무리 교훈, 훈계, 삶의 지혜 따위로 포장해 봐야, 그 칼날이 너무 예리해 아이들의 마음 한구석에 깊은 생채기를 내며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그리고 상처 입은 아이들은 그 상처를 지닌 채로 자라나게 되고, 상처가 쌓이다 보면, 앞뒤 재지 않고 유쾌하고 부드럽고 융통성이 넘쳐났던 어린 시절은 사라지고 또 하나의 경직된 어른만 남게 된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되지만 이미 진정한 어른의 모습은 잃어버린 채, 악에 받친 또 한 명의 나이 든 누군가로 바뀔 수도 있다. 우리 어른들에게 아이들을 그렇게 방치하고 절벽으로 내몰 권리는 없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고 서로에 대한 이해, 배려 그리고 공감이 무엇인지 보여줘야 한다. 진정한 어른을 보여줘야 한다!
어떻게 하면 월 오육백을 벌어도 저렇게 지겨워 보일 수가 있을까.
늘 어둡고 지겨운 표정을 짓고 다니는 박동훈 부장(이선균)을 향해 이지안(아이유)이 건네는 대사이다.
대사를 듣고 나니 내 양심이 찔려오기 시작한다.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버젓한 직장에 다니며, 먹고살만하니 약간의 여유도 부릴 만큼씩이나 벌면서도 늘 지겨운 표정을 지어 왔던 나!
세상엔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은가를 꼽아보면 손가락 발가락을 다 동원해도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나의 가족들이 몸 건강히 지낸다는 아주 평범하지만 기적적인 사실부터,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직장에 다닐 수 있다는 참으로 감사한 사실을 잊고 살아온 세월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물론 세상살이는 돈으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에 주변의 불편한 인간관계를 참아내야 하거나, 가족이나 본인의 건강상 이유 등 여러 가지 문제거리가 생길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리라!
그리고 우리가 그 어느 세대보다도 풍요롭고 안정된 시절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항상 삶을 불안해하고 지겨워하는 데는, 많은 사회학자들이 언급하듯이 몇 가지 주요한 원인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문제와 고통에 너무 집중하는 것이다. 물론 문제를 해결하고 고난을 헤쳐나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마치 눈앞이 가려진 경주마처럼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이내 감사와 행복은 놓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가끔은 주위를 둘러보자! 아마도 나의 문제는 혼자만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동료... 그 누군가는 나의 아픔을 이해하고 도우려 할지도 모른다. 문제가 풀리지 않고 불안할 때는, 마음을 열고 어딘가 있을 나의 동지를 찾아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둘째, 자신의 삶을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타인의 삶을 욕심내는 것은 현대인의 고질병이며, 특히 한국 사회에 만연되어가고 있는 매우 우려되는 현상이다. 타인과의 비교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가며 소소한 행복과 감사를 축적하자! 감사와 행복이 축적되면 언젠가는 타인도 비교의 대상이 아닌 나눔의 대상이 될 것이다.
셋째, 너무 먼 미래를 걱정한다는 것이다. 미래를 바라보고 '혜안'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는 목적이 '혜안'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개인적 목적을 달성하여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아니 때로는 남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미래를 보장받고자 함이다. 그러니 미래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경쟁자가 너무나 많다. 아무리 미래를 잘 계획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해도, 끝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한, 나 자신의 발전속도는 더디게만 느껴질 것이고, 나의 미래는 여전히 부족해 보일 것이다. 대신에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온전하고, 충실하게 살아보길 권장드린다. 오늘 내가 대하는 일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충실하자. 만약 온전한 하루하루를 쌓아 갈 수 있다면 미래의 걱정 따위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는데, 매일매일에 충실한 삶은 직장인의 숙원인 '월요병'의 치유제가 될 수도 있다!
"산사는 평화로운가? 난 천근만근인 몸을 질질 끌고... 가기 싫은 회사로 간다..."
(박동훈 부장)
"니 몸은 기껏해야 백이십 근. 천근만근인 것은 네 마음."
(친구 겸덕)
극 중 박동훈 부장이 천근만근의 몸을 끌고 억지로 회사에 간다고 문자를 보내자, 친구인 겸덕(속세를 떠나 스님이 된 친구)이 보낸 답장이다.
몸이 천근만근 일 때가 있다. 고된 중노동이나 연일 계속되는 야근을 하고 나면 그야말로 몸이 천근만근 일 때가 있다. 그럴 때 가장 확실한 해결 방법은 휴식이다. 특별한 질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면 천근만근 몸은 어느새 가뿐해진다.
그러나 마음이 천근만근인 것은 다르다. 마음이 무거워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살아갈 때는 마음뿐 아니라 몸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영혼 깊숙한 곳에도 미세한 균열을 만들며 상처를 준다. 치유 방법도 명확지 않다. 개인에 따라 원인의 종류나 깊이가 각양각색이라 타인이 진단하고 치유하기도 매우 어렵다. 더욱 힘든 것은 자신도 그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천근만근 마음을 그나마 조금은 가볍게 하는 팁이 있다. 원인을 너무 깊게 생각하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내게 주어진 다른 희망적이고 감사한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다. 천근만근의 마음을 만들어내는 원인이라면 아마도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단시간 내에 해결될 수도 없을 것이다. 내 삶의 한구석에 조금이라도 다른 희망의 빛이 있다면 그것들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견디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러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그 실마리를 자연스럽게 그리고 급하지 않게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차츰차츰 평온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혹시 하늘의 도움이 있다면, 아마도 마음이 가벼워진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욕하는 거 들으면 그 사람한테 전달하지 마.
너희들 사이에서는 다 말해주는 게 우정일지 몰라도 어른들은 안 그래.
괜히 말해주고 그러면 그 사람이 널 피해.
내가 상처받은 걸 아는 사람 불편해, 보기 싫어.
극 중 박동훈이 이지안에게 건네는 대사인데, 사람의 말이란 영혼을 울리는 천상의 언어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를 죽이는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누군가를 비난하는 이야기들은 치명적 독성을 지닌 무기가 된다.
살다 보면 누군가를 비난하는, 흔히 뒷담화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듣는다. 그중에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푸념도 있고 작정하고 누군가를 깎아내리려는 악의 어린, 말의 폭력도 있다. 만약 내가 아끼는 사람에 관한 악의 어린 뒷담화를 듣게 된다면, 마치 내가 당사자인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것이든, 타인을 향한 것이든, 비난의 말을 들었을 때는 지혜로운 대처가 필요하다. 거의 대부분의 비난은 비록 그것이 선의의 목적이라 할지라도 조금씩 상처를 내고 균열을 가져온다. 아끼는 누군가를 향한 타인의 비난과 욕을 듣게 된다면, 당사자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것도, 전달하지 않는 것도 매우 까다로운 문제가 되어진다. 그리고 이미 두 귀와 마음으로 들어버린 나에게도 불안과 균열이 생길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뒷담화의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근거 없이 들려오는 풍문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정말로 궁금한 것이 있다면 차라리 당사자와 진심 어린 대화로 풀어내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침묵이 가장 강력한 신뢰의 표시일 수 있다.
내 과거를 잊고 싶어 하는 만큼,
다른 사람의 과거도 잊어줘야 하는 게 인간 아니냐
유명 연예인들의 안타까운 자살 소식이 이슈가 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어떠한 사연이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얼마 전 극 중 박동훈 부장으로 출연했던 배우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관련하여 누군가 자신의 SNS에 올린 극 중 박동훈 부장의 대사가 기사화되어 꽤나 회자되었다. 짧은 대사지만 작금의 현실에 많은 질문을 던지는 대사이다.
왜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자살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지에 관한 안타까움을 넘어서, 과연 이 사회가 정상인 기능을 하며 살만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관한 원천적인 의문을 들게 한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는 무조건 숨기고 싶어 하며 자신의 정당성과 인권을 주장하지만, 타인의 과거는 조금이라도 문제가 발견되면, 그 문제의 정도에 상관없이 가차 없이 몰아대며 생채기를 낸다. 마치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을 연상케 하는 정신 나간 이들의 살의 어린 비난의 말들이, 교묘한 법적 테두리의 이용해, 누군가를 살인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이 되어진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예수의 심오한 가르침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고인이 된 누군가의 개인적 사정을 모두 알지 못하는 내가 그들의 죄를 정죄하거나 면죄부를 줄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 들여다본다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누군가를 극단적인 외로움과 죽음으로 내모는 암적인 원인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해 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암세포들에 맞서는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
글이 다소 길어지겠지만, 현대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암세포를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지나친 성과주의다.
현대 사회의 병폐 중 하나는 지나친 결과주의요 성과주의다. 빠른 시간 내에 신속한 결론과 최고의 효율을 통하여 최대의 성과를 얻는 것을 최상의 덕목으로 하는 교육과 사회시스템이 지속되다 보니, 사람들은 좀처럼 과정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오로지 흑백 논리에 의하여 찬반과 좌우를 가리는데 익숙하다 보니, 쉽게 거짓 뉴스와 선동에 휩쓸리고 합리적 협의와 객관적 판단력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타인, 특히 사회적 공인들을 대하는데도 쉽게 적용된다. 사건이 일어난 과정이나 객관적인 진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공감 능력을 잃어버리다 보니, 오로지 SNS와 언론에 배포된 자극적 문구에만 집착하여 비판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세상 모든 문제의 재판관이자 해결사인 양, 모든 이슈에 칼을 들이대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일부 SNS와 언론은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불의한 이득을 취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과정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죄는 사라지고 죄인만이 부각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중한 생명이 사라진다.
우리는 누군가의 죄를 대할 때 조심해야 한다. 죄가 아닌 그 사람 자체를 정죄하고 싶은 유혹이 우리의 마음속에는 강렬하다. 예수는 성경의 예화들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위해 좋은 본보기를 보이셨다. 물론 도저히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극악무도한 죄인도 있겠지만, 예수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용서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이신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이 오늘날 사법적 기준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대사회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법과 현실이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한 영역에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공동체 의식, 인류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 그 어떤 단어로 표현할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가 죄인을 대한 태도는 분명히 우리에게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 할 수 있는 힌트를 던져 줄 것이다.
둘째, 무관심 혹은 지나친 관심이다.
앞서 언급한 흑백 논리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 중 하나는, 타인을 대할 때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한다는 것이다. 무관심 혹은 지나친 관심이다.
나의 행복, 나의 성취에 도취되어, 타인을 들여다보거나 돌보는 것은 대단한 시간 낭비로 인식하는 부류가 있는 반면, 타인의 삶에 간섭하여 나의 의견을 관철시킴으로써 만족감을 느끼고 인정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타인에게 지나치게 관심하는 부류도 있다.
우리가 위 두 부류 중 하나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공감 능력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바탕이 된 관심'은 배려 있는 관심, 위로가 되는 관심, 누군가를 살리는 관심이 된다. 공감이 곁들여진 관심은 있어야 될 자리를 안다. 끼어들어야 할 자리를 안다. 그것은 무관심이나 지나친 관심이 아닌 서로를 이롭게 하는 관심이다.
셋째, 지나친 개인화이다.
개인은 소중한 것이다. 개인은 공동체를 이루고 지역사회와 나라와 전 세계를 이루는 기본 요소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화로 편중되는 것은 위험하다.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발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사회의 교육 현실을 바로 볼 때 그러한 이상은 요원해 보인다.
용서와 배려는 나와 타인 서로 간에 이루어진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나 자신만 용서하여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나 자신만 배려하여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미래 세대를 키워내는 사회라면, 그 결과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때론 이러한 사회적 병폐를 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다른 누군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동안은 별문제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다 그런데 뭘 어쩌겠냐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어른들의 욕심을 통하여 뿌리내리고 있는 극단적 개인화와 이기심은 우리에게 암 새포와 같이 퍼져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암은 나의 자녀의 때에 이르러 말기에 이르고 사망선고를 받을 수도 있다.
넷째, 용서와 배려의 결핍이다.
"내 과거를 잊고 싶어 하는 만큼, 다른 사람의 과거도 잊어줘야 하는 게 인간"이라는 대사는 용서와 배려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누군가의 죄를 무조건 잊어버리고 마치 없었던 것처럼 면죄부를 남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용서의 진정한 의미는 사실 법적인 테두리 안에 있지 않다. 사회적 기준하에 죄는 그 대가를 치르면 된다. 그것이 세상 기준의 공의이다. 그러나 용서는 죄가 아닌 사람에 대한 배려이고 사랑이다. 죄로 무너진 자에게, 누군가의 용서는 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 그리고 용서는 기적을 낳을 수도 있다. 사회적인 통념과 기준에서는 회복 불능한 죄인이 올바른 시민으로 양심 있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 예수의 사역을 살펴보면 용서에서 시작하여 용서로 끝나며 죄인들을 변화시킨다. 우리 사회도 그러한 기적이 많아지길 기도한다.
아무도 모르면 돼, 그러면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야.
박동훈 부장이 이지안에게 건네는 이 대사는 앞뒤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들어야 하는 말들이다. 단지 숨기는 게 최선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 대사는 서로를 향한 위로의 말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약하고 평범하지만 속 깊은 위로의 말이다. 상처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이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상대방의 허물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보호해 줘야 할 때가 있다. 그게 치유제가 될 때가 있다.
"고맙다.
고마워... 거지 같은 내 인생 다 듣고도 내 편 들어줘서 고마워.
고마워, 나 이제 죽었다 깨어나도 행복해야겠다.
너, 나 불쌍해서 마음 아파하는 꼴 못 보겠고, 난 그런 너 불쌍해서 못 살겠다.
너처럼 어린애가 어떻게, 어떻게... 나 같은 어른이 불쌍해서...
나 그거 마음 아파서 못 살겠다.
내가 행복하게 사는 꼴 보여주지 못하면, 넌 계속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할 거고,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너 생각하면 나도 마음 아파 못 살 거고
그러니까 봐. 어? 봐!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사나, 꼭 봐.
다 아무것도 아니야. 쪽팔린 거? 인생 망가졌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거?
다 아무것도 아니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나 안 망가져. 행복할 거야. 행복할게."
(박동훈)
"아저씨가 정말로 행복했으면 했어요" (이지안)
"어, 행복할게" (박동훈)
누구나 인생이 거지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 순간은 정말로 절망적이고 가능하다면 죽음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심정으로 내몰린다. 하지만 이 절망의 순간에 극적인 반전이 벌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 나의 거지 같은 인생을 인정해 주고받아 줄 때이다.
극 중의 박동훈 부장(이선균)은 가슴속 응어리를 안고 사는 사람이다. 직장에서의 권력 다툼에 휘말리고, 아내의 불륜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인생은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내용을 도청을 통해 알게 된 이지안(아이유)은 처음에는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지만, 점차 박 부장이라는 한 불쌍한 인간을 응원하게 된다. 그리고 이지안이 도청한 사실을 알아버리게 된 박 부장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고마워... 거지 같은 내 인생 다 듣고도 내 편 들어줘서 고마워" 하며 너를 위해서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각오한다. 드라마를 집중해서 보면, 연약한 한 인간이 또 다른 연약한 인간을 위로하고 편들어 주는 게 너무나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꼭 한번 보시길 바란다.
박 부장과 이지안이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모습은 성경에서 예수가 보여주는 '긍휼'의 마음과 유사하다. 그러나 예수의 긍휼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것만은 아니다. 사랑이 바탕이 되어 상대의 처지를 같이 안타까워하며 공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쌍한 자, 낮은 자를 위하여 행동한다. 이러한 긍휼의 공감과 행위는 거지 같은 인생의 절망에 몰린 사람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행복하고 싶다는 희망을 선사한다. 인생이 아직은 살만하다고 느껴진다.
다 들었어. 너 왜 빰 맞았는지 모른다고 말하지 말고 새꺄... "잘못했습니다!" 열 번 말해. 얼른!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우리 이러지 말자. 내가 너한테까지 마음 아프고 싶지 않다.
부장님 사랑합니다.
미친놈!
진짜 사랑합니다
극 중 박동훈 부장과 아끼는 후배 직원의 대화이다. 박동훈 부장은 아끼는 후배 직원이 자신의 뒷담화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술김에 전화를 건다. 그리고 그의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한다. 열 번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다구치는 선배의 모습에서 애정 어린 충고가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하는 실망감에 뼈저린 후회를 내뱉는 후배의 사과에 박 부장은 스스로 위로의 말을 토로한다.
"우리 이러지 말자. 내가 너한테까지 마음 아프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 말은 박 부장뿐 아니라 후배의 마음도 위로한다.
젊은 시절 나에게 이런 직장 상사가 있었다면, 나의 직장 생활은 좀 더 애정 어린 경험이 됐을 것 같다. 그러나 지나간 세월은 이제 어쩔 수 없다. 이제는 내가 이런 선배가 돼야 하겠다고 각오해 본다.
인간 다 뒤에서 욕해. 피한다고 욕 안 하는 줄 알아? 인간이 그렇게 한 겹이야?
나도 뒤에서 남 욕해.
욕하면 욕하는 거지 뭐 어쩌라고. 뭐 어쩌라고 일러... 쪽팔리게.
미안하다. 내가 다그쳐놓고...
고마워. 때려줘서.
고마워. 때려줘서.
박동훈 부장(이선균)의 토로하는 외침 속에는 자기를 향한 절박한 위로가 숨어 있다.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하는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위로받고 싶은 갈급한 마음이 절절하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지안(아이유)은 그런 박 부장의 뺨을 때리면서 위로한다. 서로의 말과 행동 속에 상반되게 감추어진 절실한 위로가 드러난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심이 있고 자기중심적이다. 그 정도가 달라서 그렇지 누구나 있다. 그래서 누구나 상대를 자신의 기준에 맞춰 판단하고 비난한다. 그 비난은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수용 가능한 불평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수용의 범위를 넘어서는 살의가 될 때도 있다. 그리고 그 비난은 떳떳한 것이 아니기에, 대부분 숨어서 한다. 마치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듯이 누군가 제삼자에게 속삭이고 그것이 퍼져나가길 원한다.
행여라도 나에 대한 비난의 말을 어쩌다 듣게 되면 십중팔구는 울화가 치밀고 얼굴이 붉어진다. 곧이어 나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비난의 화살을 동시에 쏘아댄다.
이러한 상황을 잘 해결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극 중 대사처럼 "뭐 어쩌라고"이다.
누군가의 비난과 욕을 참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최대한 무시하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게 유익하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것은 누군가의 비난과 욕 속에 내 참모습이 담겨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난을 견디는 동안 나는 또 한 번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