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베를린에서 (Unorthodox)

영화 이야기

by hesed by


# 들어가며


평생토록 영화를 많이도 좋아했고 많은 감동을 받기도 하고 많은 눈물을 쏟아 내기도 했건만, 정작 영화가 불러일으켜준 수많은 감동과 눈물을 정리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소 부끄럽기도 하고 영화와 함께한 수많은 시간을 망각의 저편으로 던져버리긴 너무나 아쉬워 나에게 무언가 묵직한 것들을 던져주었던 영화들을 정리해 보고자 하는 의욕이 강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영화는 책과 다른 장르이긴 하지만 매우 유사한 면도 있는 것 같다. 표현의 방식이 다르고 그 감동을 흡수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누군가의 인생과 경험 그리고 상상을 녹여 넣는 수고와 누군가에게 수많은 교훈, 감동, 재미를 주는 면에서는 쌍둥이처럼 닮은 면도 있다. 그래서 유독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많은 것 같다.


# '하디시즘', 경건의 모양


데브라 펠드먼 (Deborah Feldman)의 동명 자서전 'Unorthodox : The Scandalous of My Hasidic Roots'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도 역시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원작을 두고 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이야기의 전개가 매우 촘촘하며 시종일관 무겁게 가슴을 눌러오지만 감동과 질문을 한꺼번에 던져 준다.


개략적인 내용을 살펴보자면, 뉴욕 윌리엄스버그의 하디시즘(엄격한 유대교의 한 형태) 공동체에서 엄격한 규율을 따르며 살아가던 '에스티'라는 여주인공이, 숨이 막힐 듯 엄격한 규율의 신앙 공동체를 벗어나 자유를 찾아 독일 베를린으로 가는 이야기이다.


먼저, '하디시즘'에 관한 간략한 지식이 필요하기에 요약해 보면, 18세기 중반 동유럽에서 시작된 유대교 신비주의 운동으로, 오늘날 하시디즘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가장 큰 하시디즘 공동체는 미국, 이스라엘, 영국 등에 있으며, 뉴욕의 브루클린에 있는 윌리엄스버그와 크라운 하이츠 지역은 하시디즘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이다. 하시디즘은 본래 유대교 경건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삶 속에서 세속적인 것을 비워내고 제대로 신의 뜻을 따르자.'는 것이 그 본래의 목적이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뉴욕에 위치한 하디시즘 공동체는 폴란드 출신의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만들어진 공동체라고 한다. 홀로코스트에서 학살당한 600만 명을 원상 회복시키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 중 하나였으므로, 여기서 여자들은 오직 출산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고,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 잠자리 문제까지 감시하고 공유한다. 그리고 결혼한 유대인 여자는 머리카락을 남편 외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보이면 안 된다는 오직 율법적인 이유로 결혼을 하면 머리를 밀고 모자나 가발을 써야 했다. 또한 모두가 율법대로만 살아야 하고, 아이들은 교육을 받지 못하며, 오직 일부 남자아이들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 공동체였다.


하디시즘 공동체의 삶은 '제대로 신을 따르자'는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제대로 자신만을 따르자'변질된 율법과 속박으로 서로를 꽁꽁 묶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 '복된 안식일', 누구를 위한 것인가?


복된 안식일
('그리고 베를린에서' 中 하디스즘 유대인들의 인사)


'에스티'는 최소한의 짐을 꾸려 급하게 독일 베를린으로의 탈출을 감행하고 있었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사실상 서로를 감시하는 형국이라 일반적인 외출을 가장한 채 자신이 거주하는 공동체의 건물을 빠져나가려 시도한다. 그러나 그날은 마침 안식일이었고 '에스티'의 동서들은 안식일이므로 짐을 가지고 나갈 수는 없다고 에스티를 막아선다. 급기야 '에스티'는 모든 짐을 다시 방에 놔두고 지폐 꾸러미와 기본적인 서류만을 몸속에 숨긴 채 건물을 빠져나와 공항으로 향하게 된다.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그녀는 간신히 독일 베를린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 속 장면들 속에서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은 만날 때마다 유독 외쳐대는 인사가 있다. 바로 '복된 안식일'이다.


자신들만의 정통성과 규율을 목숨처럼 여기며, 그 전통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며 -그들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서로를 돌봄이라는 미명 아래 감시하는 공동체, 이 숨 막힐 듯한 사회에서 '복된 안식일'이란 말은 그야말로 "오늘은 안식일이니 네가 안식일의 율법을 위반하는지 나는 철저히 봐야겠어!"라는 숨겨진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영화 속 하디시즘 유대인들이 건네는 무심하고도 냉소적인 '복된 안식일'의 인사말은, 당초 참된 '안식'의 의미와 다르게, 무섭고 두렵운 어느 간수의 위협처럼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마가복음 2장 27절)



# 누가 돌보는 자인가?


요점은 우리 사람이 길을 잃게 둘 수 없단 겁니다.
('그리고 베를린에서' 中 랍비의 대사)


'에스티'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에스티'의 남편과 시부모들을 비롯한 하디시즘 공동체의 유대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어쩌면 이해할 수 있으나 용납하지 못하는- '에스티'의 행동에 대해, 하디시즘 유대인 공동체를 이끌어가던 랍비에게 대책을 요구한다. 이때 랍비는 에스티의 남편인 '얀키'의 사촌에게 '얀키'와 같이 베를린으로 가서 '에스티'를 찾아오라고 명령하며, 차분하고도 서늘한 어조로 이 대사를 내뱉는다. "요점은 우리 사람이 길을 잃게 둘 수 없단 겁니다."

랍비가 말한 '우리 사람'이라는 의미는 무슨 의미일까? '사랑과 관용으로 감싸안는 우리'가 아닌 것은 너무도 분명해 보인다. 랍비가 말한 '우리 사람'이란, 바로 '나의 사람, 내 율법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지켜야 될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럼 과연 '길을 잃게 둘 수 없다'라는 의미는 또 무엇인가? 랍비의 그 차분하고 서늘한 한마디 대사는, 너무나도 자연스레 '나의 율법의 추종자를 한 명도 잃을 수 없다. 그들은 우리만의 율법 외에 그 어떤 다른 길로도 갈 수 없다.'라는 고집스럽고 분노에 찬 고함소리로 들려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 가족의 의미


(얀키) 우리 결혼한 지 거의 1년 됐어! 토라의 첫 번째 계명이 바로 출산이라구!
우린 가족을 이뤄야 해 끌리든 아니든 간에 말이야.
(에스티) 탈무드조차 약속해요. 가족을 만드는 기쁨에 대해서요. 탈무드는 명확하게 말한다고요.
(얀키) 여자는 탈무드를 읽어선 안 돼!

('그리고 베를린에서' 中 에스티와 얀키의 대화)


'얀키'와 '에스티'는 결혼 후 1년이 다 돼가지만, 하디시즘 공동체 모두가 기대하고 -아니 강요하는- 자녀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가던 어느 날 밤, 오직 아내를 임신 시켜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동물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얀키'와 사랑이 처절하게 메말라버린 의무만이 지배하는 잠자리를 거부하는 '에스티' 사이에 오가는 대화이다.


부부란, 이전에는 전혀 나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았던 누군가와 만나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이 아니면 그 관계를 묶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비록 법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남아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의미의 부부는 아닐 것이다. '부부 간의 사랑'은 나이가 들어갈 수록 그 형태와 성격이 '정(情)'으로 변해갈 순 있지만 여전히 '사랑'이 내포되어 있고 그것이 '부부가 살아가는 힘'이다. 또한 '부부의 사랑'은 '가족의 기쁨'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자연스레 자녀들에게 유전되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으로도 이어진다. 이렇게 이어진 가족 전체의 사랑은 형편이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기쁨으로 발산된다.


영화 속 '얀키'와 '에스티'는 불행히도 이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여기서 '에스티'는 물론 '얀키' 또한 공동체의 희생자로 여겨진다. 그는 평생을 공동체의 닫혀진 율법 교육 속에서 아내를 사랑하는 법은 물론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알지 못하는 비극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영화의 말미에는 '에스티' 뿐 아니라, '얀키'의 삶에도 변화를 암시하는 그 무엇인가가 보여진다는 것이다.



# 네 가지 질문 시간


(어린 유대인) 하나님 네 가지 질문이 있사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네 가지 질문드리오니 답을 주소서.
(나이 든 유대인) 그 답은 이러하니라.

('그리고 베를린에서' 中 하디시즘 공동체의 대화)


유대인의 관습 중에는 '네 가지 질문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 그 단어의 표면적인 뜻은 너무나도 긍정적이고 우리 삶에 필요한 습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영화 속 '네 가지 질문 시간'은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다.


한 어린 유대인 소년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네가 질문 시간을 좋아하고 그렇게 원하니, 이번엔 네가 질문해 보렴" 하는 권유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권유라기보다는 반강제적인 요구였고, 소년은 모두의 눈치를 보며 두려운 마음으로 질문한다.


"하나님 네 가지 질문이 있사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네 가지 질문드리오니 답을 주소서"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소년의 질문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이 관습은 자유로운 질문이 아닌 정해진 네 가지 질문이다. 항상 그것만을 질문해야 하며 다른 질문은 허락되지 않는다. 당연히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도 정해져 있다.


"그 답은 이러하니라"


가장 나이가 많고 어른으로 보이는 유대인 노인이 질문한 손자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흔쾌히 대답한다. 그것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소년은 하나님께 질문했지만 대답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몫인 것이었다.



# 은혜로우신 하나님!


처음에는 나도 힘들었어. 근데 지금은 애가 다섯이고 곧 여섯째가 태어나! 은혜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베를린에서' 中 에스티와 동서의 대화)


도대체 어느 부분이 은혜롭다는 것인가? 과거의 고통에 사로잡혀 그 보상으로 잃어버린 600만 명을 원상 회복하겠다고, 여자를 자식을 낳는 기계처럼 취급하는 사회, 그리고 그것을 '은혜'로 포장하는 사회!


나는 마음이 착잡했다. 과거 홀로코스트로 희생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원한 것이 이것일까? 아니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이것이었을까? 마음 깊숙이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한 수많은 거짓이 존재해 왔다. 그 거짓을 비단 성경 속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 넌 잘못되지 않았어. 다른 것뿐이야.


이해해~ 여행 중에는 다른 율법을 따르는 거지.
('그리고 베를린에서' 中 얀키가 에스티와의 재회에서 건네는 대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촘촘한 이야기들 속에 영화 내내 '에스티'의 숨 가쁘고 절박한 베를린 정착기에 집중하던 나는, 그녀가 독일 음악원의 지원 프로그램 오디션에 도전하며 부른 갑작스러운 노래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절박함은 영혼의 소리가 되어 튀어나왔고 그 절박함은 노래의 실력이 아닌 노래의 감동으로 심사위원들을 흔들어댔다. 그녀를 찾으러 왔다가 우연히 노래를 듣게 된 남편인 '얀키' 역시 동일한 감동과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에스티'의 절박한 자유를 향한 외침은 '얀키'의 마음에도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이후 베를린 거리를 배경으로 둘만의 짧은 대화가 이어진다. '얀키'는 가발을 벗은 '에스티'의 짧은 머리를 보고 잘 어울린다고 수줍게 고백하고 그녀의 행보를 지지하는 말들을 남긴다. 비록 그 둘의 재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영화는 '에스티' 뿐 아니라 '얀키"의 또 다른 변화를 암시하며 일단락된다.


넌 잘못되지 않았어. 다른 것뿐이야
('그리고 베를린에서' 中 얀키가 에스티와의 재회에서 건네는 대화)


'얀키'는 '에스티'와의 재결합을 원한다는 말을 그가 준비한 '음표 모양의 목걸이'와 함께 '에스티'에게 건넨다. 그러나 그녀는 예전의 공동체로 돌아간다면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절대 자유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얀키'의 제안을 거절한다. 거절당한 '얀키'의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다.


"넌 잘못되지 않았어. 다른 것뿐이야"


그들은 서로 같이 할 수 없었지만, 각자 인생의 방향을 찾은 듯하다. 영화의 이야기는 그들의 또 다른 발전을 암시하며 이렇게 마무리된다.



#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동명의 자서전의 원제인 'Unorthodox'의 의미는 '정통적이 아닌, 특이한'이라는 뜻이다.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서 '누군가의 다름을 틀림이라고 규정'지으며 '변화를 정통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비극적인 경우들을 너무나 많이 경험한다. 비단 역사 속에서 뿐 아니라, 현실의 문제는 더욱 거세다.


이러한 현실의 문제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한두 마디 말로 정리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는 너무도 단순하게 '간섭의 최소화'를 자유와 비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내 마음대로'의 의미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희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말한다.


'진정한 자유란 서로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마지막 엔딩은 '에스티'와 '독일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재회 장면이다. 그녀가 앉은 테이블을 향하여 진심 어린 기쁨과 반가움을 지닌 채로 다가오는 친구들의 모습은, 남편과 가족과 공동체가 채워주지 못한 '에스티'의 마음 속 커다란 구멍은 조금씩 채워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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