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수필
처음으로 내 책을 갖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아버지를 따라간 동네 잡화상에서 과자나 장난감이 아닌 잡지책을 골랐을 때 아버지는 대견해하셨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세대의 아버지들이 대체로 그랬던 것처럼 자식에게 감정표현이 별로 없던 아버지의 얼굴에 설핏 떠오르던 미소는 어린 나에게 책을 읽게 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 맏이라서 그랬을까? 아버지의 칭찬에 유독 목말라했고 한편으로는 문자를 읽는 행위에 집착이 심하기도 했다. 교과서를 받아오는 날이면 집안 가장 구석진 곳에 틀어박혀 정신없이 읽곤 했다. 국어책과 도덕책이 정말 재미있었다.
책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읽고 싶은 욕구에 비해 읽을 책은 늘 부족했다. 집에 있는 동화책, 위인전 등속이야 수 십 번도 더 읽었고 하다못해 외가에 굴러다니던 농민신문도 재미있었다. 아버지 서가도 숱하게 훑었지만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책을 빌리러 다니는 일이 잦았다. 친구가 책을 가져다줄 때까지 그 집 앞에서 몇시간씩 쭈그리고 앉아있기도 했고 친구의 가방도 기꺼이 들어주곤 했다. 내가 책에 유난을 떠니까 골려주려고 일부러 그런 친구도 있었고 책을 가져오마고 들어갔다가 깜빡한 친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도 어떤 책이 좋은 건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그런 것을 따져본 적은 없다. 그래야 되는지도 몰랐고 알려준 사람도 없었다. 그저 재미있어서 읽었고, 책을 통해 무언가를 알게 되면 그걸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게 좋아서 읽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읽어야 할 책과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을 스스로 선별할 줄 알게 되었다. 저절로 그렇게 됐다.
독서의 중요성에 대한 수많은 언급이 도처에 널려있는 시대다.
‘아침독서 10분 운동’ ‘독서 마라톤’ ‘독서캠프’ 등 학교도서관을 비롯해 구립, 시립 도서관, 교육청, 문화단체들의 독서운동과 독서행사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책읽기를 개인의 문제로 보는 차원을 넘어서 정책적으로나 문화적 운동을 해서라도 독서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시중에는 올바른 독서법과 체계적인 독서교육에 대한 각양각색의 지도방법들도 넘쳐나고 있다. 책읽기의 중요성에 대해서야 이견이 있을 수 없겠지만 요는, 넘쳐나는 책 속에서 책을 외면하는 아이들이 태반이고 책을 가까이 하는 아이들의 독서경향도 토론을 위주로 한 실질적인 목적을 가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독서교육이나 독서운동도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면이 적잖다. 가르치는 일을 하다보니 아이들의 독서태도에 대한 엄마들의 걱정을 자주 접하게 된다.
“우리 아이는 많이는 읽는데 깊이 있는 독서가 안 된다.”
“감성도서와 지식도서를 고루 읽지 않고 편독 한다.”
“읽고 난 뒤 내 경험과 견주어서 말하기에 서툴다.”
이쯤이면 독서 지도사 수준들이다. 안 읽어서 걱정이고 또 읽으면 읽는 대로 비판력을 갖췄는지, 창조적 사고능력과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이 길러졌는지 점검하고 평가하려고 안달한다. 글을 읽는 아이들의 능력이나 상황, 목적은 다 다르다. 그래서 각각의 책 읽기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논술과 입시에 맞물려 독서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걸로 총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책읽기는 때맞춰 신장시켜야 하는 학습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정작 독서운동의 수혜자가 되는 아이들이나 독서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어른들이나 여전히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으로는 스마트폰을, 입으로는 책읽기를 말하면서.
‘즐거운’ 혹은 ‘행복한’ 이라는 이름을 걸고 행해지는 다양한 독서지도법과 독서환경 조성이 정말로 아이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고 있을까?
언젠가 한 일간지에 실린 '고단한 틈새 독서삼매' 라는 제목의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있다.
고물과 폐휴지를 수거하는 어느 노인이 길 한모퉁이에서 자신의 수레에 기대고 앉아 수거한 것으로 보이는 헌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고단한 틈새를 이용한 독서였지만 정말 읽고 싶어서 읽는 즐거운 마음이 보였다. 모름지기 책읽기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더해 이런 생각도 해봤다. 각종 독후공모전에서 수준 높은 독후감을 뽑는 김에 책을 읽어 정말 즐겁고 행복했던 사람에게 주는 상 하나쯤 더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