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수필
오전에 논두렁으로 산책을 갔다. 나는 지난겨울 내내 햇살의 변화를 지켜보느라 오후 4시쯤에 그곳에 갔는데 오늘은 갑자기 일찍 나서게 됐다. 논두렁 가는 길목에는 아파트 단지가 여러 군데 있다. 그곳을 지나가다 가로수 아래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노인 한 분을 보게 되었다. 옆에는 폐지를 잔뜩 쌓아놓은 수레가 있었다. 폐지를 수거하러 다니다가 잠시 쉬는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저 많은 폐지를 모으느라 할아버지가 돌아다닌 거리는 얼마나 될까.
예전에 어느 중학교에서 근무할 때 일이다. 당시 나는 한창 수업에 NIE(신문활용교육)를 접목해서 하느라 학교에 있는 신문들을 가져다 사용하고 있었다. 하루는 다른 교과의 선생님이 내게 와서 말했다.
"선생님, 신문 사용하고 남는 폐지는 모아서 전부 저에게 주세요."
선생님도 NIE를 하시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우리 친정엄마가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데 그동안 학교에서 나오는 것은 제가 다 모아서 엄마께 드렸거든요. 요즘은 선생님이 가져가신다기에."
나는 당연히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 선생님은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자기 엄마가 폐지 줍는 노인이라는 말을 어쩌면 저리도 당당하고 해맑게 할 수 있는지, 꼭 숨겨야 할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로 말할 일도 아니었다. 나라면 남모르게 조용히 가져다드리지, 저렇게 드러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과 동시에 왜 엄마가 그런 일을 하는데 번듯한 형편의 딸이 말리질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어느 날, 작은 모임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이 친정엄마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하루는 우리 엄마가 아이고, 이 나이에 폐지나 주우러 다니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말했지. 엄마 나이에 허리 굽혀 폐지 주울 수 있는 건강이 있고 폐지 모아다 주는 딸이 있으니 엄마 팔자가 얼마나 좋아. 그랬더니 엄마가 그래, 이것아, 맞다. 그러더라고요."
우리는 다 같이 웃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한동안 신문 폐지나 철 지난 참고서 같은 걸 모아 그 선생님께 드렸다.
폐지 시장이 얼어붙어서 노인 생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뉴스를 본다. 가뜩이나 헐값인 폐지 가격이 더 떨어져 Kg당 100원까지 했던 게 지금은 40원, 100Kg을 실어야 4천 원이다. 경기 침체에 폐지의 수출길이 좁아지면서 가격이 내리는 것이고, 고물상이 폐지들을 모아 압축장으로 보내는데 요즘은 물량 초과라 쌓아 둘 공간도 부족하다고 한다. 수거 자체가 안 되면 가격은 계속 내리고 그러면 폐지 줍는 노인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환경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마트 같은 곳에서는 폐지 줍는 사람들이 폐박스를 수거해 가는 대신 주변 청소를 해주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10년도 더 지난 어느 해 겨울,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그 선생님을 만났다. 어? 잘 지내셨어요? 우리는 서로 깜짝 반가워하며 인사를 나눴다. 선생님의 친정어머니는 안녕하신지 문득 궁금했지만 각자 일행들과 대기실로 가면서 끝이었다.
어쩌면 선생님 말처럼 건강하게 폐지를 주울 수 있다면, 기댈 가족이 있다면 팔자 좋은 노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까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 노인은 지난겨울을 어떻게 건너왔을까? 아직은 건강할까? 너무 춥지는 않았을까? 노인에게도 따뜻하게 꽃 피는 봄이 곧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