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정체

한 뼘 수필

by 한 뼘 수필

나는 여고를 졸업하자마자 지금 사는 지역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초임 교사 시절 몇 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이 도시에서 살고 있다.

조금 오래 전 일이다.

젊은 나는 오랜만에 여고 때 단짝이었던 친구를 만나기 위해 여고 시절을 보냈던 그 도시로 갔다. 모처럼 남편도, 아이들도 떼놓고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가서 친한 친구와 만났으니 얼마나 신나고 들떴겠는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친구와 카페에서 느긋하게 마시는 한잔의 커피는 몸도 마음도 부들부들 따뜻하게 만들었다.

애들 이야기며 여고 때 이야기며 한참 수다를 떨고 있는데 뭔지 모를 찜찜한 시선이 느껴졌다.

둘러보니 맞은편에서 웬 늙수그레한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거였다.


아니, 뭐야. 기분 나쁘게.

내가 맞받아치듯 노려보자 남자는 동행인 남자한테 뭐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남자 1의 말을 들은 남자 2가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나를 힐끔거렸다.

나이도 들 만큼 든 사람들이 왜 저리 주접스럽지?

기분이 상했지만, 친구와의 좋은 시간을 깨고 싶지 않아 모르는 척했다. 근데 이 양반들이 쉬지 않고 계속 쳐다보는 거였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불퉁거렸다.





“아니, 나잇살이나 먹어 갖고 남의 여자는 왜 저렇게 힐끔거리면서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내 말에 친구가 물었다.

“누구?”

“너 뒤에 앉아 있는, 조금 늙은 남자들.”

친구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봤다. 갑자기 친구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꾸벅 절을 하는 거였다.

남자 1, 2 모두에게 꾸벅, 꾸벅. 엥? 내가 속살거렸다.

“왜? 아는 사람이야?”

친구가 나한테 버럭 성질을 냈다.

“아. 정말 너도 참. 국사 선생님이잖아. 3학년 때 너네 담임.”

이럴 수가. 아무리 눈썰미가 없기로서니 담임 선생님을 못 알아보고 늙수그레한 남자 1로 봤다.

벌떡 일어나 남자 1, 아니 선생님 앞에 대령했다. 꾸벅, 꾸벅 몇 차례나 인사를 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애를 낳고부터 정신이 좀 없어졌나 봐요. 전엔 안 그랬는데. 자꾸만 잘 잊어먹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횡설수설 늘어놨다.

“그래, 니가 언제나 날 알아보고 인사하러 오려나 그랬다.”

선생님이 웃으며 말하셨다.

그 와중에 남자 2가 자기도 봐달라는 듯 만면에 웃음을 물고 날 쳐다봤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께 너무 죄송해서 이미 정신줄이 반쯤 나간 나는 그를 무시하고 선생님께 석고대죄하는 심경으로 허리를 90도로 굽혀 끝도 없이 인사를 하고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친구가 또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너, 한문 선생님한테는 인사했냐?”

“어? 한문 선생님? 어디 계시는데?”

“이 바보야. 너네 담임하고 같이 앉아있잖아.”


남자 2는 한문 선생님이었다. 나는 너덜너덜해졌다.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아무리 모자라는 사람이어도 이럴 순 없다. 그러나 다시 가서 이번에는 한문 선생님께 똑같은 잘못을 고할 기운도 없었다. 우리는 도망치듯 그 카페를 나오고 말았다.





나는 아이들이 날 알아보지 못해도 화를 내거나 서운해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근데 사실 그런 결심이 그리 필요치 않았다. 난 정말 눈썰미가 없어서 길치에다 사람치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만 알아본다.

학생은 학교에 있을 때 알아본다. 길에서 만나면, 더구나 화장을 하거나 사복을 입고 있으면 학생인지, 학부형인지, 지나가는 행인인지 모른다. 태반은 내가 모르고 지나가니 서운할 것도 화날 것도 없지만 길을 가다 애들 편에서 날 붙잡고 아는 체를 하면 좀 당황스럽다.

그러나 아이들이 학교에 있으면 아무리 학생 수가 많아도 기가 막히게 잘 안다.

“어? 쌤이 제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그렇게 묻는 아이들도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데 내가 그 아이들 이름을 모를 리 없다.

졸업한 지 몇십 년이 지났다 해도 학교에서 선생님들을 만났다면 내가 몰라봤을 리 없다. 그렇게 변명하자 친구가 퉁을 줬다.

“니가 원래 좀 무심하고 무신경하거든.”


선생님, 그동안 평강 하신지요? 정신없던 저는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잘 살고 있습니다. 다시 뵈면 그땐 제가 먼저 한달음에 달려가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