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수필
한 때 운암지 앞 길목에서 오이를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백발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채 할머니는 자그마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오이를 파셨다.
할머니의 오이는 여느 오이와는 그 맛이 달랐다. 오이에 간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물도 많지만 달짝지근하고 간간했다.
오이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할머니의 오이를 먹고 부터 그 맛에 홀렸다.
토요일 아침마다 운암지를 가는 게 오이를 사기 위해서 였던 적도 있다.
그런데 할머니의 셈법이 독특했다.
처음 할머니를 만났던 몇 년 전에는 대여섯 개의 오이를 단돈 천 원에 파셨다.
그것도 많은데 못난이 오이를 예닐곱 개나 덤으로 주시곤 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도 할머니는 까만 비닐 봉지에 한 가득 담아 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 우리 집에서 키우는 거라 억시 맛있어.
경작지에서 대량으로 키우는 것보다 텃밭에서 조금씩 기르는 풋것들이 훨씬 더 맛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 쳐도 할머니의 오이는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정말 맛있는 오이였다.
한 번은 돈을 더 드렸더니 천 원만 빼고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면서 기어이 돌려주셨다.
내가 키운 것이라 맛있어. 그 말만 되풀이 하면서.
할머니의 인정어린 셈법을 잔돈푼으로 계산하는 게 죄스러울 지경이었다.
다음 해부터는 그나마 이 천원을 받아서 다행이었다.
- 아이고, 계산 좀 잘 해봐라, 그기 뭐꼬?
옆에서들 그렇게 한마디씩 했으니까.
하루는 쪼그리고 앉아서 오이를 사는데 어떤 여인이 와서 오이를 달라고 했다.
할머니가 오이를 담으려 하는데 손놀림이 어눌해서 비닐 봉지가 잘 열리지 않았다.
내가 재바르게 비닐 봉지를 꺼내 오이를 담으려고 하는 순간, 여인이 사나운 눈초리로 날 보면서 말했다.
- 아, 놔둬요. 할머니가 담게.
나는 무안해서 오이와 봉지를 스르륵 놓고 우물쭈물 일어났다.
돌아서 오는 길에 남편에게 말했다.
- 할머니가 손이 불편하시니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그 아줌마는 왜 나한테 성질이지?
남편이 말했다.
- 그니까 당신은 아무 데서나 나서지 좀 마. 오지랖은.
- 뭐,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냐?
- 이 사람아, 생각 좀 해봐. 당신은 보나마나 덤은 안 넣을 거 아냐. 할머니는 덤을 더 많이 주시는데.
- 아니, 내가 넣어도 할머니가 챙겨 주셨겠지. 막말로 꼭 덤까지 챙겨야 하나?
나는 걸어가며 계속 구시렁거렸다.
그 맛있는 오이를, 허리도 구부정한 할머니가 손수 가꿔서 그렇게 챙겨주시는데 매번 덤까지 바라나?
그러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가 떠올랐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나라고 그런 마음이 없었을까?
더 많이 챙겨주는 덤에 혹해서, 할머니의 계산 속 없는 셈법을 재밌어 하면서, 혹은 좋아하면서 그 오이를 우걱우걱 먹었던 건 아닐까?
코로나 이후 할머니를 뵌 적이 없다. 남편과 나는 할머니의 안부가 궁금할 때마다 말한다.
- 이제 일손 놓고 편히 쉬시는 모양이야. 다행이지, 뭐.
그래도 가끔 할머니의 오이가 참 먹고 싶다. 그대들은 간간한 오이를 아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