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수필
딱 22년 전, 광복절에 백두산 천지를 올랐다.
거창한 의미가 있었던 거는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날이었다.
남편 회사에서 연수 형식으로 보내준 부부동반 여행이었다.
백두산과 연변을 거쳐 북경으로 가는 코스였다.
한창 젊을 때라 해외여행이라는 것만 좋았다.
중국의 너른 들판을 줄곧 달리면서 낮은 능선만 보니 이상하게 멀미가 났다.
연암 박지원은 광활한 요동 벌판을 앞에 두고 '통곡할만한 자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새로운 세계를 접한 기쁨을 울음으로 말한 탁월한 문장이야 말해 뭐 할까만!
무지한 나는 너른 벌판이 계속 이어지니 까닭을 알 수 없이 더 답답했다.
그러다 험준한 백두산에 가까워지면서 오히려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중국 여행이 끝나고 이어진 강원도 여행에서도 경험했다.
산세가 깊고 울울한 강원도에서 묘하게 더 시원하고 후련했다.
맑은 날이 거의 없어서 좀처럼 만날 수 없다는 백두산 천지를 만났다.
젊은 나는 감동은 저만치 밀어 두고, 내 얼굴 박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장대하고 아름다운 천지였건만 쓸 수 있는 사진이 한 장뿐이다.
백두산에 올라갈 때는 작은 버스인가 승합차인가를 타고 갔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한데 총알택시처럼 무척 빨랐다.
그래서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계곡 낭떠러지가 넘 무서웠다.
내려올 때는 야생화를 보면서 걸어 내려오는 코스를 택했다.
모르면 무모한 법. 무지가 용기를 낳는다.
파이팅이 넘쳐서 백두산을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다섯 시간, 혹은 더 넘게 죽자고 걸었다. 죽는 줄 알았다.
야생화고, 호연지 기고 다 부질없는 허언이다. 그냥 죽었다.
발에 물집은 기본이고 다리가 너무 아프고 허리가 당겨서 다음날 관광이 불가했다.
유적지도, 명소도, 기암절벽도, 깊고 너른 호수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만리장성 앞에서 만리도 더 긴 한숨을 뱉었다.
겨우 간 곳이 천안문과 자금성.
자금성 구경은 제쳐두고 웬 백발의 노파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휠체어에 탄 노파를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그분의 아들이 말했다.
어머니가 100세라며 죽기 전에 꼭 와보고 싶어 해서 모셔왔단다.
그러나 자식과 휠체어에 의지한 노인은 제대로 구경을 하지 못했다.
8월의 복더위와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고개를 늘어뜨리고 계속 졸고 있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가 빈 말이 아니었다.
나의 중국 여행기는 백두산 트레킹과 자금성 노인으로 정리된다.
몇 년 전, 엄마랑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가 코로나 때문에 불발되었다.
코로나 풀리고 작년에는 엄마 수술 때문에 못 갔다.
그전에는 내가 방학 때만 여유가 있어서 가자 가자, 하면서 못 갔다.
시간이 될 때는 또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갈 수 없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엄마는 엄마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갔다.
올해는 꼭 엄마 모시고 가자고 남매들이 의논했다.
그런데!
남편은 조 씨 남매들만 가라고 했다. 이제 비행기 타기가 싫단다.
어휴, 별나기는..
혀를 찼는데 정작 엄마도 안 가겠다는 거다. 이제는 몸도 안 따라주고 비행기도 타기 싫단다.
장모 사위가 맞장구치면서 "조 가들만 갓!" 그런다. 자금성의 그 노인이 떠올랐다.
"엄마도 더 늙기 전에 가야지, 무슨 소리야."
엄마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우리나라도 볼 것 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