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에 줄 긋는다고~

한 뼘 수필

by 한 뼘 수필

저편에서 그녀가 다가온다. 제발 아는 척 안 했으면.

사실 아까부터 나는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

같은 아파트 주민에, 같은 학부형이다.

얼굴은 부어오른 듯 불그죽죽하고 덩치는 산 만 하다.

옷이라도 좀 갖춰 입지, 보푸라기 이는 옷에 의기양양하기는....


내 마음도 모르고 그녀가 어기적어기적 다가온다.

우리가 언제 그리 친했다고, 이런 공공장소에서 굳이...

사람들이 그녀와 나를 쳐다본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힌다.



젊은 시절의 얘기다. 부끄럽지만 그랬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아파트에서 마주치면 부쩍 아는 체를 했다.

건성으로 대꾸해주던 어느 날 그녀 손에 들린 한 권의 책을 보게 된다.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아리랑'

'태백산맥'을 읽고 선생의 글에 한창 빠져 있던 참이다.

나는 단번에 그녀 손에 들린 책에 혹해버린다.

어느 순간 저자세가 되어 함빡 웃고 있었다.


아리랑을 빌려보느라 그녀 집을 들락날락했다.

벽면 가득한 책, 정갈한 집,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됐다.

아니, 그녀는 언제나 그대로였다.

모자란 내 눈이 외모만 보고 편견의 잣대를 들이댔던 것이다.


만날수록,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녀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해박함과 반듯함이 반짝거렸다.

못 생겼다고 생각했던 용모는 푸근하고 덕스러웠다.


내면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진부하지만 진실이다.

사람의 눈과 마음이 참 간사하다는 것도 진실이다.

그녀가 내 속을 들여다봤다면 내가 못난이라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나?

우리는 이 말을 풍자적으로 쓴다.

가벼운 농담 혹은 조롱의 의미로 쓰기도 한다.


어떻게 한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근본이 다르니 묻어가려 하지 말라고 경고성 멘트로도 쓴다.

그래봤자 실체나 이미지는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거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무엇으로 줄을 긋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지혜로, 학식으로, 인품으로 줄 그으면 수박인들 되지 못할까?

아니다.

이 말은 호박이 수박보다 못하다는 걸 전제한다.

이거야말로 편견이고 고정관념 아닌가.


나는 수박보다는 호박을 더 좋아한다.

특히 호박죽이나 단호박 스프를 정말 좋아한다.

집에서 호박죽 먹고 뷔페를 간다해도 호박죽부터 먹는다.


새우젓 넣고 볶아도 먹고 동그란 호박전도 만든다.

여린 잎으로 쌈도 싸 먹고 호박 인절미도 맛있다.

어느 집 마루에 점잖게 앉아 있는 늙은 호박을 상상해 보시라.

누렇게 익은 둥글넓적한 그 모습이 얼마나 정겹고 푸근한지.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고?

아이고, 손으로도 까기 힘든 호박씨를....

그런 소리 마시고 영양가 많은 호박씨나 어여 드시오.

뇌와 관계 깊은 비타민 B1이 많다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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