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기찻길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Y는 이번에 내릴 역을 결정하기 위해 기차 노선도를 펼쳐봅니다. 누렇게 손때를 타고 찢어질 것 같은 이 노선도는 삼라하게 많은 역들을 끊임없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매번 새로운 역들이 탄생하고 사라지는 노선도는 항상 미완성 상태로 제공됩니다. 심지어 누락된 역들도 많이 있지만, Y처럼 어느 방향으로 갈지 고민이 될 때는 참고할 만합니다. 유심히 노선도를 들여다보던 Y는 이전 역과 멀지 않은 곳에 다양한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소개가 붙은 역이 흥미로워 보입니다. 마치 놀이동산처럼 즐거운 공간이기를 기대하며 Y는 내릴 준비를 시작합니다. 마음을 다 잡고 스스로 결정하여 내리는 첫 역인 만큼 불안한 마음이 저 깊은 곳에서 몽글몽글 올라오지만, 이번 역도 분명 즐거울 것이라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봅니다.
기차가 역에 정차한다는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Y는 플랫폼에서 나와 역사 안으로 들어갑니다. '유재식'역의 공간은 Y에게 익숙한 서울의 공간들을 옮겨놓은 듯합니다. 저 멀리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가까이에는 정리가 덜 되어있는 익숙한 느낌의 방구석 책상과 어릴 적 학교에 가면서 지나다니던 골목 구석구석, 창밖으로 보였던 하늘의 풍경들, 서랍 속 정리되지 않은 물감들까지 이 모두 연결되어 거대한 공간의 영역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익숙한 풍경들은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추억의 이미지들이나 빛의 궤도와 같은 자연 현상들이 공간의 표면에 찰싹 붙어있습니다.
'공간'은 누구든지 항상 점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사물은 태어날 때부터 공간을 소유하고, 심지어 죽어서도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는 합니다. Y는 여기까지 타고 온 기차에서는 4번 칸 창가 쪽 좌석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가 지금은 '유재식'역 안에 위치한 계단의 17번째 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공간은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물리적 공간은 물질로서 한 개체가 부피를 가지고 공간을 차지한 것입니다. 손이나 발과 같은 신체로 느낄 수 있으며, 어떤 의지를 가지고 옮기거나 파괴하지 않는 이상 그 자리에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심리적 공간은 사람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질 수 있는 질량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감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사람이 느끼는 상실감, 마음이 허하다는 표현들은 이러한 심리적 공간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존재하기도 합니다. 몸은 편해도 마음이 불편한 공간과 몸은 불편해도 마음이 편안한 공간 그리고 둘 다 편안한 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공간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은 과연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세 가지 요소인 의식주 중 하나에 집이라는 공간이 들어가 있을 정도로, 인간에게 있어 삶은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공간'에게 저항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벗어날 수 없는 공간에 대한 사유들은 고대 그리스 때부터 이어져왔습니다. '장소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논의되기 시작한 이 철학은'공허'를 둘러싸고 데미우르고스, 플라톤,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들에 의해 논의되었습니다. 이 역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에 좀더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토포스론'에서 장소를 존재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없어서 안 되는 근원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장소를 자신을 직접 감싸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토포스(TOPOS)는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입니다.이후 20세기 중엽 프랑스의 평론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Gerard Barthes)는 자신의 저서 <사랑의 단상>에서아토포스(ATOPOS)라는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아토포스는 토포스에 결여의 의미를 가진 접두사 'α'를 덧붙여 어떠한 장소에 고정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토포스는 근원적인 것, 기억이며 아토포스는 특정 범주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공간'이라는 존재는 토포스와 아토포스의 결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필요한 근원적인 것이고, 나를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기억을 차지하는 것임과 동시에 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을 넘나들며, 사람부터 사물까지 범주와 상관없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Y에게 익숙한 서울의 골목길과 책상의 한 구석은 거대한 놀이터처럼 어릴적 좋아했던 요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문방구나 구멍가게 앞에서,좀 더 커서는 오락실에 앉아 백 원짜리 동전을 넣고 즐겨했던 게임들을 떠올리게 하는 빨갛고 동그란 우주선은 골목길에 놓인 쓰레기통 뒤쪽을 겨냥해 폭탄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뿅뿅거리는 소리로 주변을 가득 채우며 상대를 격추시키는 갤러그 같은 게임들을 하기 위해 기다리다 보면, 꼭 쥐고 있던 동전은 따끈따끈해져 손바닥에 쇠 냄새를 베이게 하곤 했습니다. 또 다른 공간인 책상 위는 Y에게 있어서 공부하는 곳이자 일탈의 공간이었습니다. 색색의 사탕과 젤리들을 엄마 몰래 서랍에 숨겨두었다가 집어먹기도 하고(솔직히 엄마는 숨겨놓은걸 다 알고 있었을 겁니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보드게임들을 하기도 하고, 아버지에게 체스를 배우곤 했습니다.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면서 몸집이 변해 바뀌어버린 책상을 바꾸게 되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이전 책상 위로 바뀐 책상과 함께하는 추억들이 쌓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집의 구석구석에 스티커를 붙이듯이 '유재식'역에는 추억이 있는 장소에 색색의 기억을 선명하게 붙여놓았습니다.
장소라는 공간은 심리적 자원이 풍요로웠던 시간, 생의 아름다운 추억을 바탕으로 머릿속에 기억됩니다. 그중에서도 고향이라는 장소는 가장 오랫동안 기억되는 공간일 겁니다. 고향에 대해서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노스탤지어(Nostalgia) 또는 향수(鄕愁)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고, 이 단어를 바탕으로 '향수병'이라는 아픔을 나타내는 병명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장소와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기억과 추억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미세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비슷한 개념입니다.
기억은 과거의 일 또는 사람을 단순히 돌이켜 생각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기억은 과거의 앎이며 망각하게 되는 것이라 정의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상기하게 된다면 이것은 기억의 현재화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상기는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는 것이며, 진리는 망각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억'은 과거의 그리운 대상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시간대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를 돌이켜 추억하는 것, 즉, '회억(回憶)'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과거의 순간들로부터 새로운 현재를 불러내어 그것을 떠올리는 '지금 시간'과 공명하게 하는 것입니다.(김남시, (2015), 과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 발터 벤야민의 회억 개념 중) 사실 우리는 추억과 기억을 나누는 것보다 회억의 과정을 더 많이 거칩니다. 예를 들어 놀이동산에 간다면 어렸을 적 처음으로 놀이동산에 간 기억이나, 중고등학교 친구들과 시험이 끝난 것을 기념하여 놀러 온 기억이 있다면 같은 장소에서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탔던 바이킹이 재미있었는데 아직 그대로 있으니 또 타볼까?", "이 자리에는 다른 놀이기구가 생겼네", "그때 여기서 사진을 찍었었는데"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이러한 수많은 기억, 추억 그리고 회억의 과정을 거치면서 과거는 종결되지 않습니다. 이미 마무리를 지은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종결된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회억의 공간들이 가득한 곳 뒤에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거의 똑같이 생긴 저 수많은 집들 중에서 Y의 것은 없는 사실이 조금 슬프게 다가옵니다. 현대에 집이라는 공간은 물리적으로는 복제가 가능한 공산품에 가깝습니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훌륭한 금전적 가치를 지닌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으로 일명 '보금자리'로써 안정적인 몸과 마음의 쉼터라기 보단 나의 또 다른 재산, 가치가 더 오르기 바라는 무언가, 영혼을 끌어모아야 하는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Y와 비슷한 나이의 세대들은 자신의 어렸을 적 추억의 많은 부분을 아파트가 차지하고 있을 겁니다. 내가 살았거나, 친구가 살았거나, 아파트 놀이터에서 자주 놀았거나 하다못해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상가에서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기억들이 하나쯤은 있을 테지요. 이러한 추억들은 지금 이 순간 내가 들어갈 수 없는 높은 벽이 되어버린 듯한 집들은 어색하기만 합니다. 여기서 오는 괴리감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의 좌절감을 더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이란 영원히 그대로 일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공간입니다. 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것들이 변화합니다. 작은 공간 안에서 거쳐가는 많은 물건들이 사라지고 다시 채워지기도 하고, 가족 구성원이 늘어났다가 줄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집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 여러 곳 생겼다가 한 곳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은 가깝다고 느꼈던 공간이 갑자기 어색하고 멀리 느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는 공간의 영속적인 소유가 불가능한 현대에 나타나는 공간과 공간 간의 충돌을 경험한 것입니다. 집에 처음 보는 물건이 생긴 것 같은 작은 충돌도 있지만, 같은 장소임에도 우리 집이 아닌 남의 집에 온 것 같은 충돌도 있습니다. 아무도 없지만 집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공간의 충돌이 일어난 것이겠죠. 겉 보기에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집은 거주자에게 공간끼리의 충돌로 늘 조금씩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자극 때문에, 우리는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집'에 대해 지루함을 느끼기보다 안정감을 느끼고 돌아가고 싶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Y는 충돌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면 집을 떠나가 새로운 '집'을 찾게 되는 거라고 퉁명스럽게 생각하며 발길을 돌립니다.
'유재식'역이라는 곳에서 빠져나와 다시 역의 플랫폼 중앙에 위치한 벤치라는 공간을 차지한 Y는 조금 어지러운 기분에 기차에 오르기 전 한숨을 돌려봅니다. 역 안에서 느낀 물성을 가지고 있는 공간들과 무형의 심리적인 공간들 그리고 상상의 공간들은 서로 뒤얽혀 Y에게 공간 그 자체를 인지하고 형성하게 했습니다. 끝없이 생성되는 공간들에 마치 3D 영화를 보고 나온 기분입니다. Y는 고개를 살짝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역들이 자신의 공간을 확장시킬 수 있기를 바라며 Y는 과거의 공간을 뒤로 한채 새로운 '역'이라는 공간으로 이끌어줄 기차에 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