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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Jun 10. 2022

종이 정거장

세 번째 역 | Rocks and Cloud

Y는 막상 여행의 방향을 정하자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주변의 풍경은 어디선가 본 듯해 지루한 마음이 듭니다. 조금 두근거리는 듯한 역들은 기차의 문 앞에서 내 마음에 안 들면 어떻게 하지라는 작은 두려움이 기차 밖으로 내딛는 한 걸음을 방해합니다.  

"역시 나는 답이 없어..." 

마음 저 편에서 Y를 부르는 자괴감이 점점 그 소리를 키우는 와중에 기차는 또 다른 역에 들어서려 속도를 줄이고 있습니다. 무심코 바라본 창밖에는 익숙한 숲으로 둘러싸인 들판이 보입니다. 고요한 들판을 바라보자 갑자기 구석에서 살색 외계인이 나타났습니다. 역시 외계인은 실존하는 것이었나! 두근두근한 마음을 품고 가만히 실눈을 뜨고 멀리 있는 실루엣을 자세히 보니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은 길게 늘어진 뒤통수에 진 거울 조각들을 가득 달고 있습니다. 금 전에 단단하고 반짝이지만 그녀를 옥죄고 있던 껍질을 깨고 나온 모습입니다. 구비가 없지만 Y와 마주 그녀는 기차에 갇혀 두려움에 떨고 있는 Y에게 거대한 철로 된 껍데기에서 나오라고 끌어당기는 듯합니다. 그러고는 꽃이 가득 핀 들판의 안쪽으로 뛰어가며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옷소매를 팔랑이며 멀어져 갑니다. 리를 벌려가는 그녀를 보며 Y는 홀린 듯이 가방을 챙겨 기차에서 내립니다.  

<Heavy head - One who cannot live in the present>, 2019, Performance in Talemor Park Residency 중 일부




이 역의 이름은 '정은형'입니다. 방문했던 역들과 달리 이 역은 익숙한 공간에 처음 보는 것들이 섞여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가는 공원과 호수, 다리와 도심의 가운데에 실제라면 있을 수 없는 현상들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의 출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펼쳐져 있는 넓은 호수에는 돌들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호수와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철 기둥에는 새하얀 구름이 묶인 채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떠다니는 돌들과 묶인 구름은 스스로의 정체성과 방향성의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돌과 구름은 상실을 통해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변화'는 수많은 생명체와 자연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겁니다. 작은 애벌레가 번데기로 변하고 나비가 되며,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은 바위와 땅을 깎고 옮겨 새로운 물길과 호수를 만들어 냅니다. 동일한 시간 선상에서 일어나지 않더라도 변화는 급박하게 또는 아주 천천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며 모든 것이 변한다는 이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변화는 유일한 상수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삶에서 비롯되는 무기력함 속에서 발버둥 칩니다. 계속되는 변화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안정과 자유를 갈망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고의로, 타의로, 인식하지 못한 채로 많은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것은 눈앞에 보이는 수면 위 돌들과 고정된 구름처럼 스스로의 본래의 모습일 수도 있고 가족을 찾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미아와 같은 Y처럼 나아가야 하는 방향 일 수 도 있습니다.


<High TIde>, 2018, fabric, wire, anchor, mirror, 30x60 feet, collaborated with Jennifer Thornton

거대한 호수를 빙 둘러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간 Y의 눈앞에는 로드아일랜드 주 뉴포트 시의 전 미군기지인 Fort Adams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이곳은 1799년부터 1953년까지 요새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주립공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공원의 한쪽에 위치한 요새는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요새에는 바다를 닮은 거대한 푸른 천조각이 매달려 있습니다. 마치 바다를 얇게 포 떠 매달아 놓은 듯한 이 푸른 천은 바람을 타고 넘실거리며 반짝이는 대해의 표면을 재현합니다. Y는 이 천 조각 앞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 멀리 나아가면 보이는 망망대해와 심해를 상상해 봅니다. 바다는 많은 것을 품고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다양한 물고기들, 조개나 게, 불가사리 같은 해양 생명체들, 심해의 생명체들, 플랑크톤들. 인간과 관련하여서는 바다를 지키기 위한 기술들과 바다를 해치는 쓰레기들 심지어는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함께 침몰한 배가 품고 있는 수많은 물건들과 배 그 자체와 배와 함께 물밑에 잠긴 이야기 그리고 거기에 얽힌 전설과 바다 괴물들까지도 바다 깊은 골짜기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바다는 자신에게 잠긴 많은 것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많은 유물들이 바닷속에서 시간을 멈춘 채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Y는 영화를 통해 더욱 유명해진 타이타닉호의 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거대한 유람선은 1912년 4월 14일 23시 40분 침몰되고 73년 동안 잠들어있다가 해저 4000m에서 잔해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서 인양된 유물들 중에는 14k 금과 유리로 제작된 여우머리 장식 핀, 74개의 다이아몬드가 찬란하게 빛나는 백금 펜던트처럼 귀중한 공예품들과 보험금 영수증이나 신발처럼 일상의 물건들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렇게 발견된 유물들은 사실 운이 좋은 편일 겁니다. 물속에 잠겨있던 유물들은 뭍으로 나오는 그 순간부터 닳아지고 바스러지기도 합니다. 물속에서  진공상태로 시간이 멈춰있던 유물은 다시 산소와 맞닿는 순간 폭발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휩쓸립니다. 더욱 운이 나쁘다면 바다가 가진 수많은 생명체의 힘으로 물속에서 소멸되기도 합니다. 지금 바닷속에 잠들어 있는 타이타닉호도 쇠를 분해하는 철 박테리아로 인해 분해되어 지금도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기억도 마찬가지  머릿속에 있는 듯 없는 듯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기억들은 꺼내어지는 그 순간부터 왜곡되기도 하고 바스러지기도 합니다. 니면 꺼내기도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존재했는지 자체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뇌를 사용하는 활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깊이'와 관련된 표현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생각의 깊이, 너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기억들. 이 과정에서 바다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필연적일지도 모릅니다. 지구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보다  더 내려가야 할지 모르는  기억의 수면 아래는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이 가득한 호수 속으로 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한 격랑 속으로  사람을 끌어내립니다. 어떤 물속에 들어가든지, 머리끝까지 잠기면 들리는 소리는 오롯이 나의 몸에서 올리는 진동소리인 것처럼 기 속에서는 온전 '나'로써 다. 


'정은형'역에서 보여주고 있는 '상실'은 방향성과 정체성이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들에 대한 것입니다. Y는 역의 풍광을 보며 무엇이 '상실' 완성시키는가 고민해 봅니다.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되거나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상실에 있어 '어떤'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겁니다. 누구와 또는 무엇이 사라졌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상실'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인지된 상실은 내가 무엇을 잃었는가는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는 가라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게 됩니다. 잃어버린 그 무언가는 나를 슬프게 할 거라 생각되지만 나를 기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을 해쳤던 나쁜 버릇이나 마음에 입은 상처가 아파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인연들을 기억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긍정적인 상실일 겁니다. 소실된 어떤 것들은 내면에 다양한 크기의 빈자리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생겨난 자그마한 빈 공간들은 '나'를 이루는 감정이나 자아상에 수많은 구멍을 뚫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단단한 뼈를 말라비틀어진 얇은 나뭇가지 마냥 연약하게 만드는 골다공증처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지만 '상실'을 통해 연약해져 버린 마음과 기억은 또 다른 기억과 경험으로 더욱 단단하게 다시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역의 가장 안쪽에는 역이 지어지면서 과거와 방향을 잃어버린 스스로를 해체하고 재조립하기 위한 과정 결과물이 미세하게 윤을 내고 있습니다. '정은형'역에서는 행성을 돌보는 방법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해 내고 있습니다. 역의 높은 천장에 매달려있는 작은 철 행성들은 440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통해 탄생되었습니다. 때문에 행성에는 <p440>라는 번호가 붙어있습니다. 여기서 p는 proccess를 의미하고 있죠. 철 조각들 꿰매어진 행성들은 '정은형'역뿐만 아니라 여러 역이 세워지는 과정 속에서 남겨지고 버려진 유리나 녹슨 철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습다. 버려진 조각들 꿰매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과정 속에서 버려진 것들이 어떻게 그 자체로 가치 있을 수 있는지를 담은 작생태계 생성하였습니다. 공중에 아슬아슬하게 달려 조각난 행성들은 언뜻 보면 톡 치면 부서질 것 같습니다. 게다가 붉다 못해 짙은 갈색으로 녹슬어버린 조각들은 이미 생명력이 가득해질 기회를 놓쳐버린 디스토피아의 한 구석에 존재하는 행성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너덜너덜해 보일 이 행성은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기도 하고 누락된 곳을 새로운 것으로 채워낸 결과물입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유리로 이루진 꽃들이 눈길이 잘 닿지 않는 행성의 안 쪽까지 푸르게 만개해 있습니다. 이는 멸망한 행성이 아닌 새로운 생명이 알을 깨고 나오기 직전인 상태와 같은 시작의 균열들의 모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은형'역에서는 타인의 판단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한 작은 여정 사합니다. 이 여정은 결과물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내가 그 과정을 겪으며 얼마나 즐거웠는가, 얼마나 깨달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여정 안에는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 모두와 이야기를 해보는 프로그램이 존재합니다. 기억 저 너머에 묻어두었던 타임캡슐들을 모두 파내어 다시 살펴보면 어처구니없어서 실소가 터지는 기억, 접시물에 코를 박아버리고 싶은 기억도 있을 겁니다. 분명 무엇인가 넣어두었는데 속이 텅 비어버린 캡슐들은 오늘의 내가 새로운 것으로 가득 채워 묻어둔다면, 내일의 내가 또 다른 변화를 줄 겁니다.




Y는 익숙한 변화 속에 존재하는 '정은형'역을 나와 플랫폼에 섰습니다. 기차에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틈 없이 자신을 에워 싼 외벽에 조금은 빛이 세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내일은 좀 더 밝은 공간이 되겠지요. 플랫폼의 반대편에 있는 바닷가에 서 있는 살색 여인은 Y를 배웅하러 나온 듯합니다. 살며시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건넨 Y는 새로운 기차에 올라탑니다.    


표지 - <Floating Rocks>, 2021, resin, fishing line, ink, structure, 18x9x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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