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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Jun 30. 2022

종이 정거장

다섯 번째 역 | 出港

바닷가를 따라 달리는 기차는 새파란 하늘 아래 푸르고 반짝이는 낭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름이 깊어지면서 뜨거워진 날씨는 살갗을 태우지만, 바다에 대한 로망에 가득 차게 만듭니다. 창밖에 보이는 바다 옆에서 새로운 모험을 계획하고, 사랑을 속삭이며, 파도와 함께 몰아치는 바람에 마음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Y는 많은 사람들이 여름에 즐기는 차갑고 소금기 가득한 바다에서의 물놀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거대하고 푸른 물이 내는 소리들은 사랑합니다. 같은 간격으로 모래사장을 내려치자 물 사이의 공기들이 터지며 생겨나는 철썩이는 소리들은 안정감을 줍니다. 한여름의 바다에는 물소리뿐만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도 가득 차 있습니다.




Y는 예전 버킷리스트였던 송정 해안열차에 대한 욕심을 채울 겸 이번 목적지로 바다의 한가운데 떠 있는 역에 내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예전 배낭여행으로 가보았던 아름다운 수상도시 베네치아처럼 은은한 물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조용히 떠 있는 이 '윤글'역은  치 바닷속으로 들어온 듯합니다. 이곳에서는 바닷가라면 늘 한두 개씩 발견하곤 하는 조개껍데기나 해초들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을 가득 채운 거대한 바닷물의 존재감은 마치 Y를 파도의 벽으로 둘러쌓고 있는 듯합니다. '윤글'역은 역의 형태를 하고 있는 부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끝없이 늘어서 있는 파도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Y는 부두 끝에 서서 출항 준비를 하는 선장이 된 기분입니다. 역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바닷물의 비린듯한 물 냄새와 피부에 달라붙는 짭조름한 공기는 바다 위에 배를 띄워 수평선 너머로 나가아가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출항, 35x35cm(캔버스 1개당 크기, 가변설치), 종이 판넬에 수성펜, 2021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잔잔했던 바다 위는 눈을 깜빡하는 순간에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자비한 파도를 데려와 휘몰아치곤 합니다. 이러한 바다의 모습은 누구나 평화로웠던 삶에서 거친 파도를 타고 버텨내야 하는 순간들을 반영하는 표현으로써 사용되어 왔습니다. ‘파도’는 미술에서 이미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에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받는 소재 중 하나입니다. 파도가 가지는 거칠고 위험한 속성은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을 간직하거나,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힘을 표현하거나, 삶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변화를 표현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인간 하나하나의 삶과 결합되어 고난, 역경, 헤쳐나가야 하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서양에서 가장 유명한 파도가 그려진 작품이라고 한다면,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c.1818)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팡이를 짚고 고독하게 서있는 한 남성 앞에 안개가 짙게 낀 바다 위 거친 파도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광활한 대자연 앞에 서 있는 이 남성은 프리드리히 자신입니다. 프리드리히는 어머니와 두 명의 누이 그리고 남동생을 잃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으며 우울증과 고독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결혼 후, 젊은 아내를 위해, 우울증이나 트라우마에 동요하는 자신의 감정을 누르기 위한 심적 투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양 미술에서 잘 알려진 파도는 일본의 우키요에에서 등장합니다.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시대(1603~1867) 서민 계층 사이에서 유행하였던 목판화로 후에 유럽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미술 장르입니다. 우키요에의 거장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의 후카쿠 36경(富嶽三十六景) 중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The Great Wave Of the Kanagawa)>(c.1825)는 '파도'를 그린 작품으로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작품일 것입니다. 날카로운 파도 거품들은 힘겹게 노를 젓고 있는 세 척의 배들을 집어삼키려고 합니다.


‘파도’는 '윤글'역에서는 크게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움직이고 흐르는 물로서의 파도입니다. 물은 고여서 부패되는 것에 반항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격동적으로 흐를수록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란은 언제나 크고 작은 변화를 일으키며 이역이 추구하는 이상향임과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피부에 닿는 두려움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이를 시각화를 통한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 미지의 덩어리가 아니라 명확한 형태를 가진 무언가로 성질이 바뀌게 되기에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두 번째는 부정적인 감정으로서 느껴지는 심리적 파도입니다. '윤글'역은 지어질 때 많은 심리적인 고난들이 존재했습니다. 이처럼 우울할 때마다 거칠고 어두운 파도를 바라보면서 마음속 깊숙한 곳에 박혀있던 불편한 가시들을 뽑아내는  해방감을 찾았습니다. 변화로써의 파도와 부정적인 감정으로서의 파도, 두 가지의 공통점은 스스로가 넘어서야 하는 존재니다.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 무력하기에 싸워서 승리를 쟁취한다는 전투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고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날이 추워지면 얼음이 생기며, 햇볕이 온화함을 뽐낼 때 녹아내리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듯이, 자연스럽게 주변 상황과 나의 마음에 따라서  나의 배가 움직이도록 하되, 물결에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심을 잘 잡고 있어야 합니다.


파란(波瀾), 45x45(개당)(가변설치), 종이 판넬에 수성펜, 2022

'윤글'역의 가장  시각적 특징은 펜을 주된 재료로 역을 세다는 점입니다. 펜은 그림의 기초가 되는 드로잉의 재료로서 수많은 화가들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재료적 특성으로 인해 취미 미술을 하는 사람부터 유명 예술가까지 사용하는 펜 '윤글'역의 수많은 파도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펜이 가장 주 재료가 된 이유로는 잉크가 가지는 속성일 것입니다. 본래 액체 형태를 띠고 있어 물을 잘 따르기도 하고, 유성이라는 속성을 가진다면 물을 이겨내기도 하는 잉크의 성격은 물로 이루어진 파도를 표현하는데 깊이감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검정 수성펜은 물과 만나면 색 분리 현상이 이러나기도 하는데, 남색, 보라색, 회색 등  다채로운 색으로 분리된 검 잉크는 파도가 반짝이는 표면 아래의 심연까지 품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때문에 역에는 많은 색이 칠해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파도’라는 소재를 생각한다면 떠올리는 환한 여름 하늘 아래 다채롭 빛나는 푸른빛이 아닌 마치 해의 마지막 빛줄기도 삼켜버린 밤바다나 빛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닷속에서 만날 것 같은 색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파도 거품과 검은 선으로 그려진 물결 아래 짙은 푸른빛의 덩어리는 물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검푸른색과 보라색이 주를 이루는 작품들은 마치 물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결 아래 도사린 짙은 물은 당장은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일 지라도, 물이라는 자연 심연 속에서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위험이자 동시에 순식간에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격정적인 대자연임을 보여주듯합니다. 


역에는 다양한 서사를 보여주고 있는 파도가 담겨있습니다. 하나하나  작은 파도들을 보여줌과 동시에 하나로 합쳐 거대한 풍랑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마치 조각난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연결된 서사시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검푸른 파도 덩어리들은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은 그저 작은 존재임을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고난과 역경들을 담담히 마주하는 자세를 가지려는 다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파도의 물결들은 마치 자신의 지난 고난을 잊지 않기 위해 세기고, 다음을 준비하는 자세처럼 읽히기도 한다. 앞으로 또다시 다가올 거센 파도들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회고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Y는 깊은 파도 속에서의 경험을 다음 역으로 떠나갈 준비를 합니다. 류 속에서 헤엄쳤기에 몸은 지쳤음에도 머릿속은 명징해지는 기분입니다.  수많은 배들의 출발지 같은 '윤글'역에서 Y는 스스로라는 배에 대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타고 있던 배의 조타석에 자신이 앉아 노를 저어 가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노 젓는 방법을 모르기에 그렇다 할 지라도, 어른이 된  지금은 자신에 대한 확신의 부족과 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갈까 봐 두려움에 남의 손에 노를 맡겨놓고선 불평해 온 것 같습니다. 지금 집을 떠나온 이 여행이 Y 스스로 선장이 되어 항로를 정하는 첫 발걸음으로 느껴집니다. 남들이 보기엔 이 항로 앞에는 높고 거친 파도와 폭풍우만이 존재할 겁니다. 사실 Y가 생각하기에도 다른 길보다는 거칠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즐겨보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습니다. 이 여행이 끝나면 과거 자신의 꿈이었던 Y만의 역을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역을 세우기 위한 좋은 위치와 다른 역들은 어떻게 세워져 있는지 탐구하기 위해 가방의 옆주머니에 찔러두었던 노선도를 활짝 펼치며 다음 목적지를 고민해 봅니다. 기차가 선로 위를 움직이며 나는 철컹거리는 소리가 물결 소리 사이로 점점 크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표지 - 도란(濤瀾), 20x20, 종이 판넬에 수성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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