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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Jul 20. 2022

종이 정거장

일곱 번째 정거장 | 공간의 경계

기차는 푸릇함이 자라나는 지역을 지나 점차 정돈되고 건축물들이 존재하는 지역으로 들어섰습니다. 평생을 도시에서 자라온 Y에게는 좀 더 익숙한 풍경을 보여주는 창밖은 뻗어 있는 나무들과 무성한 덤불들을 지나 언뜻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그 속내는 너무나도 다르기에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하는 곳임에 틀림없습니다.

도심의 복잡함은 같은 장소라고 할지라도 하루, 1년, 10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주곤 합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많은 역들에게 '공간'을 탐구하는 대상으로써 제공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사진기라는 매체가 발명되고 작고 네모난 필름 위에 시간을 묶어 놓을 수 있게 된 순간부터 '공간'은 천의 얼굴을 가진 재료가 되었을 것입니다.

건축물이 가득하기 때문인지 좀 더 부드럽게 정차한 기차는 눈에 익은 유리의 빛깔과 벽돌의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이 열림과 동시에 Y는 쪼개져 있는 수많은 풍경에 그만 어지러워 벽을 붙잡고 말았습니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쉬고, 간지러운 듯한 눈을 조금 문지른 Y는 다시 움직이기 전에 짐가방과 함께 기차에서 내려옵니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김태훈'역 안으로 천천히 들어섭니다.   




The Puzzling World (2021), 사진, 판넬, 144 x 108 x 10(cm)

'김태훈'역의 초입은 마치 만화경에 들어온 듯합니다. 톡톡 튀어나와 있는 수십 개의 작은 피라미드들이 벽에 붙어 눈앞에 펼쳐집니다. 분명 한 위치에 서서 둘러보고 있지만 Y의 눈앞의 풍경은 계속 바뀌는 기분에 마치 배에 올라탄 것처럼 발 밑이 울렁이는 기분입니다. 같은 풍경이 뾰족한 모서리를 향해 모여들며 반복되는 건물들 앞 길의 풍경에서 오로지 푸른 하늘만이 Y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이 땅임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삼각형의 하늘들은 미세하게 다른 푸른색을 냄에 따라 붉은 햇빛을 받아 따스한 갈색과 아이보리색으로 빛나는 건물들의 공간과 길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하얀색과 파란색 가게 건물들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풍경들은 모두 한쪽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소실점을 가진 건물들과 길은 삼각형의 꼭짓점으로 인해 보이는 착시 현상인지, 정말로 한쪽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는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연속되는 피라미드 속에 갇힌 풍경들은 공간감과 방향성을 계속해서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입체적으로 생성된 소실점들의 연속으로 인해 익숙하고 도시 어디서든 볼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은 손톱 옆에 생긴 거스러미처럼 신경 쓰이고 어색한 공기를 만들어 냅니다. 피라미드 속 공간은 내가 어디까지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에 따라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그저 푸른 하늘의 입체적 향연과 함께 물결치는 듯한 분위기로 평화로워 보이지만,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다면 순식간에 방향성과 길을 잃고 미로에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이 두 공간은 붙어있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알아채는 그 순간에는 마치 차원을 이동하는 듯한 새로운 공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피라미드들의 모임은 Y에게 공간을 대상으로써 제시하고 그것을 계속 인식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과거 종이 정거장에서 출발한 수많은 역들에게 있어서 대상이란 '미적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적 대상은 예술작품에 있어서 존재론적 또는 현상학적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뒤프렌느(Mivel Dufrenne),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카인츠(Friedrich Keinz)와 같은 수많은 이론가들이 구조적으로 예술작품을 분석하기 위해 '대상'을 사용했습니다. 미적 대상은 크게 '예술 작품(Kunstwerk)'와 '미적 자연 대상(der asthetixche Naturgegenstand)'로 나뉘지만 이 두 가지 모두 '미'라는 목적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현대 예술에 있어서 아름다움은 과거에 가지고 있던 절대적인 권력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절대적인 미의 기준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부정당했고, 예술가들의 작업의 목적으로 선택되지 않습니다. '김태훈'역에서는 아름다움을 향해가는 과정에 존재 했었던 '인식'이 '미'를 대신해 목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수십 개의 피라미드 모양으로 잘려 박제된 공간들은 어느 곳에서 어떻게 바라볼지 정해짐에 따라 체험할 수 있는 방향이 바뀐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이 수많은 소실점들 사이에서 즐겁게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일 겁니다.  


타인의 산책 (2021), 싱글 채널 비디오, 2 min 30 sec

역의 안쪽으로 들어서면 마치 미로와 같은 공간이 드러납니다. 도심 한가운데 고즈넉하고 조선시대의 우아함을 보여주는 경복궁처럼 한옥의 모습을 한 이곳은 왜곡되고 이리저리 기워진 채 움직이고 있습니다. 2분 30초 동안 보이는 궁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는 평범하고 익숙한 조선시대 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영화 '인셉션'에서 등장한 꿈속의 공간처럼 바닥이 천장에 가 있고, 바닥이 천장과 연결돼 뚫려 있으며 창 옆에는 다른 건축물이 갑자기 나타나고, 또 다른 공간은 바로 닿아 있는 바닥이 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양한 공간들을 보여주면서 열려 있는 문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창문을 통해서 옆으로 흘러가기도 하면서 움직이는 공간이 반복됩니다. 친구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이나 조선시대 왕이 등장하는 사극 하다못해 역사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궁의 모습은 우리의 눈에 익숙하지만 어딘가 어긋난 채 Y를 태우고 움직입니다. 궁이라는 익숙하고 특정한 공간을 뒤섞어 반복적으로 제시하면서도 평소에 익숙한 방향이나 형식으로 제시되지 않기 때문에 흘러가는 공간들 중에 어느 곳이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연속적인 이 공간은 보는 사람이 이미지의 서사의 순서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닥에 물이 가득한 공간이 가장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가 돌아가는 여정으로 느껴질 수 있고, 옆에 나타나는 현대적인 건물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면 과거와 현대의 만남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한 여정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Y가 보고 있는 궁의 모습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역에 방문해 이곳을 본다면 Y와 다르게 인식할지도 모릅니다.


시선의 흐름은 무의식을 통해 움직이곤 합니다. 주변에 형성된 환경, 이웃이나 선생님과 같은 사람들, 태어난 나라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 대상들을 지나친 눈길들은 모여서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이를 통한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여기에 완벽하게 똑같은 가치관이라는 것은 존재하기 어렵기에, 아주 미세한 차이라도 지니고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게 됩니다. 단단하게 형성된 가치관은 끊임없이 무의식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아'를 생성합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사이 만들어진 자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선택하는 모든 과정에 영향을 행사합니다.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이 사용했던 "토끼와 오리(Kaninchen und Ente)"그림에서 토끼나 오리를 고르는 것도 시선의 흐름에서 나온 결과물일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의 과정 속에서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말한 "안과 밖의 변증법"이 일어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발췌) 사람들은 존재를 확인하고 확정하고 싶어 하며, 이를 통해 모든 상황들의 상황을 제시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를 대면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존재에 대한 선을 긋고 이를 확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정착되지 않은 존재이기에 안과 밖 사이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바슐라르는 '안'을 구체적인 것으로 '밖'을 드넓은 것으로 보며 경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더욱 확실히 하였습니다. 역에서 보여지는 이 공간에서도 경계를 찾기 어렵습니다. 분명 창밖의 하늘도 보이고 서까래 뒤 공간들이 존재하지만 땅따먹기 하듯이 똑바른 선을 그어 잘라낼 수 힘듭니다. 서로 위치와 시간들이 뒤섞여 있는 이 곳은 단순히 상상의 영역에서 생성되는 곳이 아닌 실제할 것이라는 신뢰감을 가진 사실적 공간이기에 계속해서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지럽게 공간들이 엮여 있는 '김태훈'역이지만 둘러보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서 지도나 나침반과 같은 도구들은 Y에게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Y가 나아가고 선택한 방향이 바로 Y에게 알맞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역에서는 모든 관람객들에게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제시할 겁니다. 그리고 그 길들은 모두 관람객에게 있어서 옳은 길입니다.

헤매지 않고 플랫폼으로 돌아온 Y는 자신이 종이 정거장에서 시작해 기차를 타고 지나왔던 모든 철길들 역시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남들보다 조금 돌아가고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텅 비어 있는 철길 위 전광판에 다음 열차가 곧 플랫폼으로 들어온다는 안내문이 떠오릅니다. 노선도를 한 손에 쥐고 Y는 다시 새로운 역으로 나아갈 준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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