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을 지을 때 뭐가 가장 중요할까? 그 건물이 세워질 토대가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땅을 단단히 다지고 건물을 지탱할 철근을 단단하게 박아야 쉽게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찬찬히 역을 세우기 위한 계획을 시작한 Y는 어디에서 삽을 뜰지 결정하기 전에 다른 역들의 지대를 둘러보려고 합니다. 먼저 둘러볼 곳으로는 자연과 생명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을 골랐습니다. 우리와 가장 밀접해있고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자연은 많은 사람들이 역을 세울 때 토대로 중요하게 사용하는 소재입니다. 이미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Regentag Dunkelbunt Hundertwasser)' 같은 유명한 자연주의의 거물과 같은 역들은 푸른 자연에 녹아들어 거대한 숲의 요새와 같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Y는 이러한 역들 끄트머리에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소아'역에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우소아'역은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받는 플렌테리어의 느낌이 가득합니다. 싱그러움이 느껴짐과 동시에 잘 가꾸어진 SF영화 속 비밀스러운 정원과 같습니다. 새하얀 비밀정원에는 익숙한 식물들과 처음보는 생명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곳곳에 얌전히 놓인 식물들은스투키, 아래카야자, 칼라크로톤처럼 누군가의 집에서 본 듯한 종류들로 놓여있습니다. 전자파 차단이나 공기 정화처럼 우리에게 이로운 기능이 있다고 여겨지는 식물들입니다. 종이와 섬유와 같이 가볍고 익숙한 재료들과 일상 풍경에서 자주 보이는 물건들이 눈에 띄는 이 역은 이 생명체들은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생명체들의 가장 기본단위라고 할 수 있는 세포들과도 닮아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다양한 화약약품과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이 세포들은 이 역에서 만큼은 새빨갛고, 노랗고, 초록색을 뽐내며 자신의 존재감을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마치 자신을 꼭 보아주기를 바라고 있는 듯합니다.
예술에 있어 '생명'이라는 것은 근간이 되는 요소입니다. 아주 먼 옛날 글이 없어서 그림으로 의사를 표현하던 시기에서부터 많은 그림들이 생명을 염원했습니다. 기원전 17000년에서 15000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라스코 동굴벽화(Lascaux Caves)에 그려진 붉은 소는 생존을 위한 염원이자 소의 생명력이 번창하여 인간들 또한 배부르기를 기원하는 것이었습니다.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蔚州 大谷里 盤龜臺 岩刻畵)는 오랜 세월 동안 세대를 거듭하며 해양동물과 육지동물의 종류와 사냥방법에 대한 지식을 새겨넣음과 동시에 풍요를 기원하는 문화적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염원은 문자 시대가 도래하면서 수많은 나라들에서 창조된 신화 속으로 넘어가 아름다운 여신의 모습을 띄고 '뷜렌도르프의 비너스', '아데미 여신상(The Artemis of Ephesus)'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대지예술이나 퍼포먼스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로버스 스미슨(Robert Smithson)의 <Partially buried woodshed>(1970)와 같은 작품은 개발되지 않은 장소나 산업화 후에 버려진 장소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개조한 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이 소생하는 것을 보여주며 자연이 가진 위대한 생명력을 이야기합니다.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퍼포먼스 <7,000그루의떡갈나무(7,000 Oaks)>(1982~1987)는인간이 자연과 환경을 공유하고,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기 위한 재생력을 보여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처럼 수많은 예술가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생명을 외치고 있으며 지금 Y가 서있는 이 '우소아'역도 마찬가지입니다.
Extremely fresh (2021) 종이 위에 색연필, 나무판텔 위에 수채화, 아크릴, 식물, 환기구, 섬유, 바퀴, 가변크기
Y는 이 작은 화원에서 먼저 홀로 서있는 화면에 살며시 다가가 살펴봅니다.설익은 강낭콩들이 모여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막 여물기 시작한 꽃봉오리들을 모아놓은 것 같기도 하고, 동글동글한 언덕 봉우리들이 여름옷을 입고 모여있는 듯합니다. 계속 쳐다보면 내장의 융털을 확대시켜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초록색 불량식품을 먹고 나서 혓바닥에 놓인 미뢰들을 크게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납작한 화면 속 꿈틀이는 초록의 덩어리들에게서 정적이나 고요와 같은 단어들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덩어리들은 마치 땅 속에 묻힌 씨앗처럼 화면 뒤편에 올록볼록한 덩어리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화면에서 처럼 초록, 노랑, 빨강,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들은 통통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손가락처럼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 옆 벽면에는 경첩으로 또 다른 풍경이 붙어 있습니다. 이 풍경은 마치 작은 씨앗이 자라나 나무로 성장하는지 그리고 그 나무가 어떻게 다시 씨앗을 만들어 내는지, 순환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창문처럼 열리는 이 풍경은 풍경 뒤에 작은 풍경들을 숨기고 있어 큰 순환의 일대기를 위해 필요한 다른 자연의 생명력이 가진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풍경들 사이에는 바퀴를 달아 움직임이 자유로운 식물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움직이기 힘든 식물들은 정적이라고 생각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을 걸쳐 위아래, 옆으로 뻗어나가는 힘과 다양한 방식으로 씨앗을 멀리 퍼트려 번식하는 이들이 고정되어있기에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시각적 요소들은 과학적인 원리에 따라 규칙과 자연만의 확고한 이유를 가지고 생겨난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알기 어려운 우리는 자연을 볼 때 여기 놓인 네모난 풍경들처럼 규칙을 가진 구성으로 보일 때도 있고, 아주 자유롭게 자라나는 추상적인 이미지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몬드리안(Piet Mondrian)이 여러 해에 걸쳐 그려냈던 나무들을 살펴보면 자연이 가지는 구성과 추상 사이의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초기에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느낌의 나무들을 그렸다면, 후기에는 선과 직사각형 그리고 비구상적 형태가 자연에서 왔다는 그의 믿음아래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본질만을 그리려 하였습니다.
'우소아'역의 화원에는 길에서 볼 수 있는 은빛 환기구들과 고무 배관을 화분 삼아 다양한 식물들이 길러지고 있습니다. Y는 핫핑크와 주황색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의자에 앉아 식물들을 하나하나 관찰해 봅니다. 독특한 환기구들과 어울리는 식물들의 모습이나 노란 고무장갑의 데코는 요즘 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 '식집사'를 떠오르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식물을 공기 청정, 미화, 식용을 목적으로 길러왔습니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 이후, 집에 격리되어 외롭지만 다양한 이유로 반려동물을 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반려식물을 만들어 내면서 식물은 인간의 삶에 더 가까이 들어왔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온 식물들은 다양한 이로움을 제공하면서 안전한 곳에서 돌봄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지구의 자연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식물이 본디 가지고 있던 강렬한 생명력을 꺾고 집안에 가두어 둔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야생성을 잃어버린 이 식물들을 살려내기 위해 더 많은 전기와 화학비료들을 소비해 자연을 파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스스로가 제대로 돌보지 못한 식물이 그 생을 다하면 이건 별로였다면서 무책임하게 쓰레기통에 넣어버리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경작1 (2017) 혼합재료, 가변크기
이 역의 한쪽 코너에는 계속해서 자신의 면적을 조금씩 확대시켜가고 있는 생명체가 있습니다.아메바 같기도 하고 미생물 같기도 한 이 생명체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아주 특별한 지점이 존재합니다. '우소아'역에 세워진 화원 구석구석에 새롭게 식물을 심고, 보수공사를 하고, 또 다른 공간들이 생겨날 때 생기는 부산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기쁜 듯이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을 하고 둠칫 둠칫 리듬을 타며 움직이는 이 생명체들은 씨앗이 땅을 뚫고 새순을 낼 때처럼 시작이라는 에너지를 시각적으로 발산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세워진 수많은 역들은 슬프게도 지구를 아프게 하는 요소들을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물감의 베이스가 되는 카드뮴, 코발트, 비소와 같은 수많은 금속 화학물들, 분리수거가 되지 않는 재료들, 물을 오염시키는 기름들, 계속해서 베어지는 나무들이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사용되고 버려집니다. 현대에 와서, 공공을 위한 크고 아름다운 작품들이 만들어지자, 재료도 작품을 위한 공법들도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성이 인간과 지구에도 모두 이로울까? 여전히 조각 작품들에 사용되는 F.R.P에서 유독성분이 나온다는 점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듯합니다. 환경보호와 예술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둘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잡을지는 많은 설치 작가들이 하는 고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자신의 작품으로도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소금을 재료로 하는 모토이 야마모토(Motoi Yamamoto/山 本 基)의 <바다에 되돌아가다 프로젝트(Project 海に還るプロジェクト)>(2006~)는 전시가 끝난 그의 설치 작품들을 부수어 관람객들과 함께 다시 바다로 되돌려 보냅니다. 작품으로 사용된 대량의 소금을 다시 바다라는 자연의 사이클로 보내는 과정을 사진으로 공유하고 동참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우소아'역은 자기 자신의 안에서 모든 재료들을 선순환하면서 지구와 자신을 생태적으로 연결하고 이를 시각 언어화시키려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물품들을 재활용하거나, 분리수거를 통해 새로운 재품으로 만들어내 듯이, 자신이 만들어낸 작은 세계 안의 모든 재료들은 버려지는 부분을 최소화하기 위해 계속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Y는 끊임없이 자생하며 확장하는 '우소아'역의 화원을 나오며 자신의 역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게 할지 고민해 봅니다. 인간이 지구를 떠나 살아갈 수 없는 만큼, Y가 지을 역의 정체성과 상관없이 '환경'은 반드시 고려해봐야 하며 미래를 위해 적용해야 할 요소일 겁니다. 하지만 '식물'처럼 선택할 수 있는 재료도 존재할 겁니다. 떠날 준비를 하는 기차에 올라타며 Y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정보를 얻고 역을 지을 재료들을 고민해 보기 위해서 노선도를 펼칩니다. 무너지지 않을 Y의 역을 세울 준비를 위한 여정은 기차가 역을 떠나며 방향을 찾아 헤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