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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Jul 30. 2022

종이 정거장

여덟 번째 정거장 | 해체의 부유

과거, 역을 지었던 많은 사람들은 미술에 집중하고는 했습니다. 아름다움을 가진 미술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많은 학문들을 활용했지만 그들은 모두 '미'를 위해 희생되었습니다. Y 역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상상을 하면서 한 가지에만 집중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깊이 있는 탐구를 위해서는 앞서 지나온 역들에서 경험해 왔던 철학, 문학, 환경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는 것을 깨닫고는 다른 학문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었습니다.

여러 영역들과 결합된 모습들은 새로 지어진 역들을 중심으로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Y는 많은 사람들이 미술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에 대한 철학을 품고 있는 '손효정'역으로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약간의 두려움을 안고 바라본 '손효정'역으로 들어선 기차의 유리창 밖 풍경은 흑백의 다양한 크기와 형상의 도형들이 동동 떠다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중구난방 하게 떠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하나씩 살펴보면 그들만의 질서를 가친 채 위치를 잡고 있습니다. 무한한 우주에 펼쳐진 수많은 행성, 소행성들의 질서를 모두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천체의 질서가 존재하는 것처럼 부유하고 있습니다.


Space that hides raindrops that dafy law of nature (2021) oil on canvas and collage, 117x91(cm)

첫새벽 같은 차가운 푸른빛과 달조차 뜨지 않은 밤하늘이 존재하는 이곳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둥근 빗방울들이 여기저기서 떨어지는 와중에 수많은 물체들이 빗방울을 막아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공간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는 것 자체가 통용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우주에 물을 한가득 쏟거나 뿌려버린 것처럼 완벽한 구를 이루고 있고 Y의 위에서 빗방울들을 막아주고 있는 물체들도 고정된 바닥에 앉아있지 않습니다. 공간에 떠다니며 비를 막아주고 있는 수많은 물체들은 평소에 자주 보던 책장이나 훌라후프 같은 존재도 있고, 물체의 겉면을 말끔하게 다듬은 육면체, 피라미드 꼴, 사각형과 같은 도형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고, 멀리서 내려다본 것처럼 산과 호수의 미니어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높낮이가 다른 투명한 바닥에 놓인 것처럼 다양한 투시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마치 수십 개의 물방울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면서 보는 다양한 풍경의 시점처럼 보입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중력의 영향을 받습니다. 물건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닐 수 없는 것들은 우리에게 있어 진실입니다. 하지만 '손효정'역에서는 이러한 중력을 거스른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때문에 평소에 우리가 바라보지 못하는 각도의 세계를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풍경은 마치 멀티버스처럼 여러 차원에 존재하는 물체들이 동시에 나타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흔히 미술시간에 배우곤 하는 원근법 또한 이 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원근법은 과학적 사실들의 영향으로 나온 미술의 방법론 중 하나로, 멀리 있는 물체는 작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낸 후 하나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모든 것들이 작아지도록 만들어진 방식입니다. 눈앞의 공간에서는 우리의 눈이 가지는 물리적이고 시각적인 진실이 해체되고 부유되고 있습니다.


Untitled (2019) pencil and collage on paper, 27x22(cm)

동그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손효정'역의 한편에는 특별한 기계가 놓여있습니다. 한눈에 보이지 않는 이 거대한 기기를 소개하기 위해 근처에는 도면이 놓여있습니다. '불규칙한 날씨 만드는 기계 스케치'는 매일 날씨가 다른 이 역만의 특별한 기계를 설명합니다. 비가 많이 오면 장화를 신고 우비를 입고 튼튼한 우산을 펴고. 비가 조금 오면 3단 접이식 우산을 펴고, 한 방울씩 떨어진다면 손을 우산 삼아 지붕과 지붕 사이을 뛰어가곤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들을 모두 분석한 뒤 확률 함수로 계산해서 다시 날씨를 만드는 기계입니다. 때문에 '손효정'역의 날씨는 정해진 계산 값에 따라 매일매일 변화합니다. 이 기계는 굉장히 행동 분석학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행동'이라는 것은 많은 행동주의 학자들에게 유전과 환경이라는 두 요소에 의해 결정되어 간다고 정의됩니다. 특히 존 왓슨(John Watson)의 행동주의가 이 기계의 핵심 부품이 될 것입니다. 그의 주장 중에서 특히 환경에 의한 인간의 행동의 변화에 대한 것이 중심부를 차지합니다. 특히 모든 행동은 환경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고 말한 그의 주장은 이 기계에 없어서는 안 될 기어입니다. 날씨가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면, 행동이 날씨에 영향을 주는 반대 상황을 이 기계는 '손효정'역 안에서 실현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각 시스템과 사고방식, 자연법칙의 존재와 존엄성을 유지하면서도 현재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존재해도 괜찮은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시작, 중간, 결론을 시간이 흐르는 순서대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손효정'역은 정해진 법칙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 사이의 틈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규칙으로 그 틈을 메우며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던져지면 사람들은 시작과 끝을 찾으려 합니다. 이를 통해 인과관계를 맺고 각각의 사람이 새로운 이야기와 법칙들을 창조해 결론을 내립니다. '손효정'역에서 Y는 우리 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질서'라는 것이 파괴되고 역이 제시하는 새로운 질서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공간 속에서 역이 지어지는 공사 중 설계도에 의해 물리적으로 재정립된 익숙하지 않은 질서들은 역을 방문한 여행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모릅니다. 이 혼란은 시각에서 발생할 수 도 있고, 사유의 순서에서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규칙대로 정해진 답을 가지고 있던 것들은 '손효정'역에서 해체되고 자신만의 새로운 답을 가지게 됩니다.




더운 날씨를 피하라는 듯 차가운 물방울들이 가득한 '손효정'역의 평소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자극들을 만끽하며 고민을 해야 하는 수많은 공간들을 지나쳐 Y는 다시 플랫폼 앞에 서 있습니다. 오랜만에 생각을 많이 해서 머리가 따끈해지는 기분이지만 Y는 사유의 자극들이 즐겁기만 합니다. 조금은 지쳐버린 자신을 위해, Y는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초콜릿을 하나 꺼내 물으며 5분 뒤 도착할 다음 기차를 기다립니다.


표지 - Untitled, (2022) oil and collage on canvas, 91x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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