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근방에 머물고 있어 오랜만에 들러볼까 고민하였는데 그 지인과는 이번에도 볼 수가 없나 봅니다.지난 역에서 신나게 구경한 탓에 폭신한 기차 의자에 등을 기대고 조금 졸았더니 마음속으로 정해두었던 역을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저 아쉬운 마음에 건강하냐는 메시지만 남기고 다음을 기약해 봅니다. 자신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Y는 어쩔 수 없이 조만간 문이 열릴 다음 역에서 내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차피 목적지도 안 정해 놓았는데 문제 될 것 없을 거라면서요.
최희준, <보이지 않는>, 2020, 캔버스에 분채, 미디엄, 116.8x80.3cm
기차가 역에 천천히 들어서면서 보이는 유리창 너머 풍경은 지난번 역과는 다르게 푸른색과 청량한 공기가 넘쳐흐르는 기분입니다.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어 Y는 폐 속 가득히 차가운 공기를 넣어봅니다. 이게 피톤치드인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옮깁니다.방금 발을 내딛은 '최희준'역은언젠가 여행지 버킷리스트에 적어두었던 뉴질랜드의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이나 중남미의 광대한 열대우림과 같은 곳이 떠오릅니다.진한 초록과 연둣빛의 덩어리들은 숲의 한가운데에 Y를 내려다 두었습니다. 그 옆에 거칠게 흐르는 깊고 청량한 울트라 마린 색은 하늘과 숲 속의 거대한 호수 사이의 경계를 없애버렸습니다. 자연의 색과 닮은 뭉개진 가루 안료들은 바람이 강하게 불기도 하고 갑자기 스콜이 나타나 온통 축축해지는 변화무쌍한 밀림처럼 덩어리가 지고 풀어져 역에 있는 깊은 숲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이 역은 마치 해리포터에 나온 마법의 거울처럼 '최희준'역이 가진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심상 공간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그공간은안에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숲을 품고 있습니다. 숲은 많은 사람들에게 명상의 공간이자 자연과 생명의 위대함을 느끼게 하는 장소입니다. 일명 지구의 허파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브라질의 아마존 숲처럼 지구 전체의 산소를 책임지는 숲부터 사랑하는 반려동물과 함께 걷기 좋은 작은 숲까지 존재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모든 생명체에게 '숨'을 쉴 수 있는 산소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숨'을 쉰다는 것은 꽃 속에서 잠을 청하는 조그마한 멧밭쥐부터 지구 상에서 발견된 가장 큰 동물인 흰 수염고래까지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하는 필수적인 행위입니다. 특히 인간들은 숨을 쉬면서 자신이 살아있음의 흔적을 남기는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숨을 거둔다면 그 이야기도 거기서 마무리를 맺게됩니다.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인간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영원히 쓰기 위해 '숨'을 연장하기 위한 많은 발버둥을 쳤습니다. 과거 많은 권력자들의 꿈이었던 불로불사, 진시황이 찾던 불로초, 부활을 꿈꾼 이집트의 파라오들, 현대에 와서는 냉동인간까지. 더 오래, 영원히 숨쉬기 위한 사람들의 염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영생을 위한 여정의 최종 종착지는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Utopia)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로 토마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모어는 소설에서 '유토피아'라는 이상적인 섬나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 사용하였고, 점차 '낙원', '천국'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유토피아는 종교적 낙원 '에덴동산'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얀 브루겔(Jan Bruegel)과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인간이 타락한 지상낙원(The Garden of Eden with the Fall of Man)>이나 요한 페터 벤첼(Johann Peter Wenzel)의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에서 에덴은 광활하고 풍요로 가득 찬, 일명 젖과 꿀이 흐르며 영원한 아름다움이 지속되는 공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허구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만지거나, 냄새를 맡거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머릿속에서 각자 가장 환상적이며 이상적인 무엇인가를 상상한 공간입니다. '유토피아'가 허상이라는 사실은 허구임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서 뿌리내린 집착으로 이어집니다.
최희준, <흔적: 자화상>, 2021, 캔버스에 분채, 미디엄, 116.8x80.3cm
역이 지니고 있는 자연의 모습들은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꽃과 나무의 형태들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있습니다. 이는 '최희준'역이 지어질 때 맨몸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손으로 하나하나 퍼올려진 안료들은 팔, 다리, 배 등 온몸을 통해 역 위에 비벼지고 올려졌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과거 한국에서 맑은 물을 떠놓고 손을 비비며 구도하는 행위와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무속 신앙을 통한 구복 기도를 할 때 많은 한국사람들은 손바닥을 마주하고 비비곤 합니다. 맞닿아 잇는 신체가 얼마나 강하게 비벼지는지에 따라 그 기도가 얼마큼 간절하고 거대한 것인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완전함에 다가기기 위해 가루 안료를 신체로 비비고 손톱으로 긁는 행위를 통해 유토피아를 온몸으로 염원하고 있습니다. 온몸을 바쳐 비빌 정도로 간절한 염원은 낙원이라는 존재가 허구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유토피아에 대한 집념입니다.
깊은 숲을 탐험하는 베어 그릴스의 기분을 한 껏 느끼며 소망으로 가득 찬 거짓된 생명력을 비춰주는 심상 공간이 만들어낸 숲의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풍경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푸르고 거친 자연을 뚫고 마주한 장면은 화사한 프리지어가 가득 피어있는 듯한 풍경속에 한 여성이 누워있는 모습입니다. 처음 보지만 왠지 모르게 눈에 익은 듯합니다. 말없이 창백한 흰빛으로 누워있는 그녀는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아(Ophelia)>를 닮았습니다. 14~15세기 이탈리아 미술에서 영감을 얻으며, 꾸밈없는 자연의 묘사를 찬양했던 밀레이는<햄릿>에서 버림받은 오필리아가 죽어가는 모습을 표현하며 그녀의 '죽음'이 헛되이 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오필리아>를 그렸습니다.그러나 '최희준'역에 누워있는 오필리아는 밀레이의 오필리아가 아닙니다. 햄릿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한 인간의 공허함과 상실감이 그녀 주변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어떤 감정이 비슷할 까 고민하던 Y는 픽사(PIXAR)의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 2>에서 쥬디가 버려지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 장면에서 설명하는 쥬디의 공허하고 슬픈 마음이 Y의 앞에 누워있는 오필리아와 닮아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장에서 제조되어 소모품으로 사용되는 장난감이 버려질 때 마음가짐보다, 사람이 다른 이에게 버려질 때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실감은 더욱 강렬할 것입니다.
물질적 유토피아는 넘쳐나지만 사람들의 마음의 상실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Y는 마음의 상실을 견디다 못해 자신의 주변을 영원히 떠나버렸던 몇몇 사람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기술의 눈부신 발전을 통해 현대에 이르러 정점을 찍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과거를 찾으며 말했던 물질적 빈곤은 사실 현대의 우리에겐 와닿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이웃과의 교류, 대가족의 모습들 또한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윗집, 아랫집,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기술의 발전으로 문학과 예술의 풍요로움을 즐기는 것 또한 메말라갑니다. 작게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독서량이 줄어들고, 사용하는 언어의 풍요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풍요를 충족시켜주는 수많은 것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최희준'역이 실재하지 않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를 찾는 이유일 겁니다. 역의 출입구 근처에 아주 작은 글씨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의 구절이 적혀있습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시계를 보고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해 손바닥 안에서 무한을 붙들고 시간 속에 영원을 붙잡아라...
우리는 아름답고 이상적이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붙잡으려는 행동을 통해 역으로 현실에서 얻는 수많은 공허함과 상실감을 잊고 치유받게 될 수 있을 겁니다. 비록 그 과정에 거칠고 처절한 어찌 보면 고통스러울 수 있는 행위의 대가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요.
푸르른 자연을 거닐게 된 Y는 연달아 우연히 모르는 역들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인지, 공사가 마무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역들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습니다. Y는무작정 뛰쳐나온이여행에 방향이라는 것을 설정해 보기로 했습니다. 집에서 아주 멀리 있고,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 덜 마른 페인트 냄새와 촉촉한 물감의 덩어리들이 존재하는 역들을 방문하기로.
또다시 역으로 새로운 기차가 들어옵니다. 하늘과 깊은 바다만큼 푸르러 생생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간절한 소원을 품은 자연과 함께 하는 '최희준'역을 뒤로하고 다음에 내릴 역을 찾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