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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May 22. 2022

종이 정거장

첫 번째 역 | 폭발


Y는 가방에 옷가지들통장 그리고 약간의 현금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고 집에서 뛰쳐나와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얼핏 가출 같아 보이는 이 여행길 사충동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Y는 어렸을 적 가족과 함께 보았던 드높고 찬란한 역들을 사랑했습니다. '미켈란젤로'역의 새하얗고 부드러운 살결 같은 대리석과 '세잔느'역의 달큼한 냄새가 흘러넘치는 거친 사과들, '모네'역의 시간대별로 모아진 찬란한 햇빛들은 Y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Y는 언제나 자신만의 역을 짓고 싶었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는 네가 사랑하는'미켈란젤로'와 '세잔느'와 '모네'처럼 될 수 없을 것이라 Y를 무시하곤 했습니다.

"네가 과연 할 수 있을 것 같아?"

Y를 둘러쌓고 우울해지는 공기와 스스로를 의심하며 좀 먹는 생각들은 집에서 내쫓아 여행길에 오르게 했습니다.  

때문에 Y에게 특별한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집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나려 했을 뿐입니다. 간간히 흔들리는 창문에 밖의 푸른 옷을 입고 논밭을 굽어보는 산의 자태나, 발랄한 노래를 부르며 흘러내리는 강물을 슬쩍 쳐다보다가 이만 커튼을 휙 쳐버렸습니다. 그저 조용히 침잠하듯이 여행길이 지속되기만을 바랬습니다. 그러나 여행만큼 변덕스러운 것은 없듯이 Y의 앞에 펼쳐질 여정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펑! 소리와 함께 기차가 자갈돌 위를 달리는 것처럼 덜컹거립니다. 초점 없이 창밖을 응시하던 Y는 겁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지지직거리는 스피커를 통한 기차에 이상이 생겨 이번 역에서 하차하라는 차장의 안내뿐입니다. Y의 의지와 상관없는 첫 여행지가 정해지고 말았습니다.  




요동치며 느리게 움직이던 기차가 드디어 Y의 첫 번째 목적지에 천천히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창밖의 풍경은 용광로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뜨거운 쇳물처럼 타오르는 주홍과 빨강이 보입니다.

Y가 첫 번째 역에서 내리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피부가 녹아내릴 것처럼 뜨겁다 못해 따끔거리는 열기 가득것입니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회색빛 풍경 속에서 둥글거나 역동적인 열기의 덩어리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위로 치솟기도 하고 둥근형태를 하고 있기도 한 다양한 불꽃들 사이에는 동남아의 나무들과 포클레인, 거대한 선박들이 놓여있습니다. 저 멀리에는 석유 시추기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 역 이름은 '이인승'입니다.  역은 굴곡지고 역동적이었던 아시아의 역사를 바탕 삼아 그 위에 세워졌습니다. 특히 근대에 들어서면서 급변하는 경제와 기술의 발달이라는 기류에 제대로 탑승하지 못했던 많은 아시아의 국가들은 롤러코스터와 같은 시대의 파도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럽의 경제발전을 위해 침략당해 식민지로 전락해 착취당했던 아시아는 제국주의 시대 막을 내리면서 독립을 쟁취하고 근대화된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Y는 과거 세계사 수업시간에 들었던 아시아의 역사를 곰곰이 떠올려 봅니다. 일례로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미얀마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독립 의용군의 전쟁과 쿠데타를 통해 1947년 자치 공화국을 수립하였지만 크나큰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종교와 소수종족의 반발을 사면서 무력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고, 군사 독재체제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악화되는 경제 상황으로 1988년부터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아웅산수지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 세력은 군사정권에 의해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15년 미얀마 총선거를 통해 첫 번째 민주 정부가 구성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민중의 피로 얼룩진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국권을 강탈당한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제국이 연합국에게 패망하기 전까지 수탈을 당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 했으나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으로 인해 좌우익 세력의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해 수백만의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당하였고 남과 북이 분단이 되었습니다. 참혹한 전쟁의 후유증을 딛고 경제를 복구해 나갔으나 민주주의를 향한 항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4.19 혁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과 같은 수많은 운동이 일어나면서 1987년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주의 정부가 새로 출범하게 됩니다.

이처럼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내전, 폭력 시위, 독재 정권과 같은 고통을 동반한 역사를 뚫고 발전을 이룩해 왔습니다. 거친 역사의 흐름을 피하기 위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생존을 위해 나라를 벗어나 이민자가 되면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이라는 또 다른 역경을 마주하게 되며,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슬픈 현실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행했던 진취력을 이해하고 잊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하는 이 역에서 '폭발'은 요동치는 아시아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Y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뜨거운 김을 내뿜는 폭발들을 향해 다가가 자세히 살펴봅니다. 사실 '폭발'은 여러 상호작용과 우연의 산물로 볼 수 있습니다. 폭발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어떠한 물체가 옆에 있었는지, 폭발의 매개체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날의 온도가 높았는지 낮았는지, 공기가 물기를 가득 머금어 축축하였는지, 바싹 마른 빨랫감처럼 바스락거리는 공기였는지 같은 수많은 요소들은 결과물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폭발할 때 발생하는 구름의 모양, 불꽃의 색깔이 전부 다양하게 나타나겠죠. 이는 화학적 요소를 통해 발생하는 폭발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너지 효과를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적 사건이나 새로운 기술의 발전과 같은 사회문화적인 '폭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들은 수많은 인과관계들이 얽혀 있기에 명확한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확산되어 수많은 다른 곳에 불을 지피기에 '폭발'적입니다. 역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폭발'의 덩어리들은 폭발의 과정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강렬한 붉은빛을 뽐내는 폭발의 덩어리에서 눈을 돌려 이 세계의 풍경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서로 다른 명도와 색채를 가진 작은 원들이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인 점들은 배가 되기도 하고 포클레인이 되기도 합니다. 점으로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Seurat)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4)를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색색의 작은 점들을 찍어 가족과 연인들이 나른하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그려낸 풍경은 빛이 부서지는 듯이 화창한 모습을 잘 표현해내 모두에게 친숙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과 연결되어있는 정거장은 조르주 쇠라의 방법보다는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이 떠오릅니다. 당시 대중문화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만화를 선택했던 리히텐슈타인은  색을 하나하나 나누어 점으로 찍어내는 벤데이 닷(Ben-Day dot) 인쇄기법을 차용하였다. 벤데이 닷은 오래된 신문이나 잡지에서 보이는 기법입니다. 유사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역도 신문과 잡지의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합니다. 이미지를 가지고 보도하는 인쇄물처럼 아시아의 사회구조 변화의 순간을 포착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점들은 모두 모노톤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모노톤 즉, 흑백의 색조를 가진 대표적인 예술은 무엇일까라고 질문한다면, 답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컬러사진이 더 친숙하겠지만 그 역사는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제하고 기록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진 기술 또한 함께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 초상사진의 획기적이 유행 후 으젠느 앗제(Eugene Atget)이나 만레이(Manray)와 같은 작가들이 예술사진을 제작하면서 사진이라는 매체를 시각예술화 시켰습니다. 역에서 만들어낸 풍경이 흑백인 것은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초기 흑백 사진은 대상을 정확히 복제하는 수단으로 여겨졌다가 점차 사라진 시간을 현재에 붙잡아 두는 새로운 시간 개념을 일깨워 주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보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현재에 다시 불러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사진은 시대적 상황, 문화의 반영을 기록하고 대변하기도 합니다. 동아시아 성을 표출하고자 하는 이 세계에서 모노크롬은 동아시아를 사실적인 기록매체인 사진의 특성을 이용하여 재현시킴으로써 다시 일깨워 주는 장치로써 작동합니다.




Y가 둥둥 떠다니는 폭발이 덩어리들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새로운 기차가 역으로 다시 들어오고 있는 소리가 울립니다. 아는 곳이라서, 계획적으로 내린 장소는 아니었지만 이 역은 Y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우연히 마주한 인상 깊은 폭발들은 Y에게 발견의 매력을 한 껏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이제 Y는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아시아의 뜨겁게 요동치는 역사 폭발시키는 '이인승'역을 떠나 다음 역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사진출처: 이인승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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