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정거장
프롤로그 | 수많은 정거장들, 만나서 반갑습니다.
Y는 여행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건너가 다른 나라에 착륙하면 똑같은 성분으로 구성된 공기 층임에도 불구하고 오묘하게 다른 푸른 빛깔을 내는 듯한 착각에 빠져 마음이 둥실 떠오르는 그 기분을 즐기곤 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에 우리는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새로운 장소에서의 짧은 삶을 시작합니다. 따사로운 4월 봄날 오후 3시쯤 햇볕 아래 골골 송을 부르며 엎드려 있는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주변 풍경과 사람을 관찰하기도 하고, 한여름의 날씨와 반대되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닷물이 즐거운 소년과 그의 친구들처럼 온 마음과 체력을 다해 그곳을 즐기기도 합니다. 때로는 태풍이 불거나 눈보라가 휘몰아친다면 이불 밖은 위험한 것 같은 마음이 들듯이 가만히 한 곳에 머물며 여러 생각 속으로 침잠하기도 합니다. 짧고 새로운 자극이 되는 삶이 끝난 뒤에 일상으로 무사히 돌아올지, 새로운 곳에 정착할지, 또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버릴지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겠죠.
오늘도 Y는 평소처럼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이번 여행은 조금은 특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행에 필요한 왠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진이 담긴 여권, 환전한 지폐들이 가득 찬 지갑, 여행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으로 충동구매해버린 새 옷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두 눈, 이해되지 않아도 인정할 수 있는 유연한 마음가짐이 이번 여행의 필수품일 것입니다.
Y의 여정이 시작되는 종이 정거장은 다양한 모습을 가진 하얀 종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베일 듯이 차가운 하얀색, 거울처럼 모든 빛을 반사해 눈이 시린 하얀색, 빛을 머금어 온화해 보이는 하얀색까지. 다채로운 흰빛의 향연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신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종이 정거장은 사람들이 붓과 물감, 연필과 지우개, 끌과 정으로 만들어낸 세계들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들은 시간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났습니다. 갓 뿌리를 내린 새로운 세계들은 종이 정거장과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많은 역들은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다시 되돌아오곤 합니다. 가끔은 홀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죠. 모두들 시작은 종이 정거장에서 출발했지만 완공된 역들에서는 시작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종이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유한 자신만의 색깔을 강렬하게 내뿜는 역들은 스스로가 결정한 재료들로 견고하게 쌓아 올려져 있습니다.
종이 정거장에서 비교적 가까운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이 유명한 역들은 이제 그들에게 영속될 후광을 가지고 신적인 위치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역들은 많은 이들은 찬사와 존경을 품은 발길을 받아내고 단단해져 더 이상 역이 무너질 일은 없을 겁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피카소, 앤디 워홀, 리히텐슈타인 역들은 강렬한 미적 가치로 유명함과 동시에 가십에 둘러싸여 유명세를 치르곤 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를 연 역사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습니다. 아주 멀리 위치한 제프 쿤스, 뱅크시와 그 주변의 역들은 이제 막 타오르는 초신성과 같은 역들입니다. 강렬한 빛으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Y의 이번 여행 계획에는 위대하고 유명한 역들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Y는 이제 막 뿌리를 내리고 보드라운 연둣빛 순을 내기 시작한 역들을 방문할 겁니다. 이 역들은 종이 정거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심지어 역이 없어졌다가 다시 지어지거나 영원히 사라지기도 합니다. 이 길고 복잡한 기찻길 위에 처음으로 역으로 세워진 작은 세계들은 아직 많은 방문객들이 알지 못하지만, 아직 가공되지 않은 보석들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다듬어지고 찬란한 빛을 머금게 된다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다이아몬드처럼 우리에게 영원히 지속될 예술을 통한 새로운 경험을 약속해 줄 테지요.
Y는 보물찾기 같은 이번 여행을 통해 만날 다양한 세계들을 품은 정거장들에게 경의와 애정을 담은 인사를 하며 기나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수많은 정거장들 만나서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