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 한 스푼>
둘째 아들이 쌀쌀해져서 포근한 플리스 점퍼가 필요하다고 했다.
학원을 마치고 사러 가기로 했다.
쇼핑몰 폐장시간에 임박해서 가려니
마음이 조급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는 통화를 마치고 얼른 차에 시동을 걸고 아이를 기다렸다.
숨을 여러 번 고르고 있어도
아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것을 보니
휴대폰은 무음모드일 테고 친구들과 도란도란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꿀맛 나게 주고받고 있을 것이 눈에 그려졌다.
10분 넘게 차에서 기다리다 읽다 말고 온 책이나 읽는 게 낫겠다 싶어 다시 집으로 들어가니
부글부글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딱히 화를 낼 상황이 아닌데, 나의 조급증이
습관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이가 학원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쇼핑몰 문 닫기 한 시간 전이다.
그 어느 때보다 조직적으로 시간을 관리해서
파워 J다운 면모를 보이며
눈썹 휘날리게 날아가야
미션을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장보기를 포기했다. 운전을 해야 하기에
운동 후 짜륏한 맥주 한잔도 포기했다.
암 뤠디.

그런데!!
엄마 속도 모르고
느긋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아이는
플리스를 입고 있었다.
"아니~ 플리스를 입고 있으면서 왜 또 플리스를 산다는 거야? 꼭 사야 하는 거야?"
"어~이거보다 더 부들부들한 게 있어 ㅎㅎ"
"아니~매장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었는데 연락은 안 되고 엄마가 얼른 태우고 가려고 차에서 10분도 넘게 기다렸는데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
"아.... 미안해...."
화가 난 기색이 역력한 엄마 눈치를 보다
2층으로 올라가 버린다.
"사러 가지 말자..."
"지금 입고 있는 게 있는데 그래도 사야겠으면 더 늦기 전에 얼른가! 오늘 쇼핑 가기로 약속해서 해야 할 일들을 미루고 시간을 빼놨단 말이야."
"(깊은 한숨)..... 안가.... 이런 분위기로 뭘 어떻게 사러가.... 안 살게"
"그래도 니가 꼭 필요하면 엄마의 불편한 심기에도 불구하고 사러 가자고 말해! 진짜 꼭 사야 되면 그럴 수 있어야 하고, 엄마가 화났다고 사러 가기 싫으면 꼭 필요한 게 아닌 거지!"
2층에서 아이의 퉁퉁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좀 전 보다 더 깊은 한숨 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분을 못 이겨 덜그럭 거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저벅저벅 계단을 내려오며 말한다.
"가자...."
와.... 짝짝짝

대단하다.
더럽고 치사해서 그냥 안 사고 말아야 마땅한데
이 아이는 순간의 감정을 누르고
필요한 선택을 했다.
내가 못하는 걸 이 아이는 할 수 있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하고
상대방이 내키지 않아하는 낌새를 느끼면 그냥 멈춘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하면 좋지만
안 해도 아쉬울 것 없다는 마음이다.
함께 하는 즐거움보다
내 자존심이 더 값지다고 착각했다.
서툰 엄마를 닮지 않은 대견한 아들이다.
다정함 두 스푼>
그렇게 달달하지만은 않은 짧은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파니야 아빠 차 키 좀 가져올래? 엄마 차 충전하려면 아빠 차 옮겨야 할 것 같아."
차 두 대를 왔다 갔다 옮겨 다니고 있는데 아이가 나를 한참을 지켜본다.
??
왜 안 들어가고 보고 있지?
뭐 할 말 있나?
나는 물었다.
"왜?"
어깨만 으쓱이고는 별 말이 없다.
성격 급한 엄마는 늘 차를 삐뚤빼뚤 대기 때문에
인도 블록에 부딪힐까 걱정되었나 보다.
따뜻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길엔 거들먹거리지 않는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정함 세 스푼>
새 옷을 사서 기분 좋은 귀염둥이 막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간다.
"파니야~저녁 먹어~"
"파니야~밥 식는다..."
아무리 불러도 함흥차사다.
꼬까옷 사고 신나서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있나?
그런데 뭔가 펄럭 거리는 '퍽! 퍽!'소리가 들렸다.
세탁을 마치고 입을 닫고 있는 세탁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빨래를 넌다.
저녁 먹고 스터디 카페 간다는 아들이
그 틈에 잽싸게 빨래를 넌다는 것은
매끄럽지 않았던 쇼핑의 시작에 대한
사과의 제스처다.
어차피 아빠도 늦게 오니 엄마 차지가 될 일에 손을 보태주고 싶었던 다정함이다.
다정함 네 스푼>
저녁을 먹고 공부하러 스터디카페에 간단다.
"잘 다녀와~"
삐릭~철컥~
그런데 이 녀석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나간다.
밤 9시가 넘어 홀로 있을 엄마가 걱정되었는지 문단속을 세심하게 하고 외출한다.
문을 잠근다는 것은
엄마 이제 걱정 말고 하루를 마무리하세요~라는 뜻이다.
찬 바람 쐬며 문단속하러 나오지 말라는
배려의 뜻이다.
우리 집은 아파트에 살 때는 없던 루틴이 생겼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아빠가
1층 난로에 불을 지핀다.
따뜻한 열기가 위로 올라가 2층, 3층을 서서히 데우면, 다른 식구들은 이불 밖의 한기를 느끼지 않고 기분 좋게 아침을 맞는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은 마땅한 일인 듯하나
자식이 부모를 돌보아준다는 것이
아직은 어색하고 낯설지만 기분 좋은 일이다.
기어 다닐 때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맞춰주는 것으로
다정함을 표현했던 아이가
이제는 잔잔하게 하루에도 몇 번씩
눈빛으로 손길로 따뜻한 말 한마디로
나를 위로한다.
아무 맛도 나지 않던 밋밋한 하루에 행복의 맛을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