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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냥해지고싶다 Mar 22. 2024

신뢰의 가장 어두운 그늘: 사기당한 순간

사기를 당하고 나서야 깨닫는 것들(1)

 울렁거린다. 구역질이 참을 수 없이 치밀어,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쏟아낼 거 같다.


 '나, 개인회생한다. 못 갚아서 미안해.'


 이 한마디에 지금까지 열심히 쌓아왔던 내 안의 무엇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무너져 내리는 나를 붙잡기 위해 전화기를 잡고 무슨 소리냐고 울부짖었지만, 상대방은 침묵으로 답을 한다. 그저 운이 없었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형사로 고소하려면 고소하라고 한다. 자기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내가 무슨 생각으로 돈을 빌려줬을까 하는 자책을 해보지만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었다. 지나고 나서야 생각이 난다. 분명 돈을 못 갚을 것 같은 징조들이 있었다. 밀린 보험료와 카드값을 지인에게 빌리러 다니는 모습. 왜 돈이 없냐는 나의 물음에 잠시 현금흐름이 막혀서 빌렸다고 변명하던 것들이 사실 다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하얗게 질려 사무실로 들어온 나는 동료들의 물음에 아무 답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조퇴를 했다. 집으로 향하지 못한 나는 화창한 바닷가를 거니는 수많은 사람들 속의 웃음 속에 섞여 걸어보지만, 우울감은 전혀 희석되지 않고 더 깊이 스며들어온다. 바닷물이 가슴까지 차버린 지금, 난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를 재우고 머뭇머뭇거리며 아내에게 말을 꺼낸다.


 "저번에 말했던 거 있잖아... 21년도에 빌려줬던 돈. 그 돈 못 받을 거 같아..."


 아내는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만, 딱딱한 나의 표정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더니 살며시 나를 안아준다. 아무 말없이 안아주는 아내 품에 안겨 한참을 아이처럼 울었다. 21년에 저질렀던 내 어리석은 실수에 대한 후회와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어두운 거실에서 한참을 울고 나니 아내도 그제야 이야기를 꺼낸다.


 "어떻게 할 거야...? 그 돈은 정말 못 받는 거야?"

 "아니... 우선 채무자부터 다시 만나보려고. 그 돈이 어떤 돈인데..."


 7천만 원. 아내와 딸아이 하나를 두고 있는 외벌이 가정에게는 아주 큰 금액이다. 이렇게 큰돈을 차용증도 쓰지 않고 빌려주다니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우선 채무자에게 다시 연락해 보겠다고 이야기하며 아내를 애써 안심시켰지만, 아내도 쉽지 않을 일임은 분명히 직감하는 듯했다.


 21년은 나에게는 정말 힘들었던 해였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려 일적으로 나를 괴롭혔고, 천정부지로 치솟던 부동산과 주식 가격이 나를 FOMO에 가둬 재정적으로도 자꾸만 실수를 만들었다. 점차 작아지는 내 모습에 실망하며 만회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지인은 내게 다가왔다.


 지인들과 개설한 단톡방에서 멋진 수익을 뽐내던 지인은 넌지시 나에게 권했다. 너도 이제 좀 벌어야 되지 않겠냐고. 아이가 크는데 나중에 목돈도 많이 들어갈 텐데. 자신에게 빌려주면 나중에는 크게 돌려주겠다고 이야기하며 온갖 감언이설로 나를 유혹했다. 남들보다 한참을 뒤처져 있다고 생각하여 초조함에 발만 동동 구르던 나는 그 유혹을 이길 수 없었고 결국 돈을 빌려주게 되었다.


 아내가 잠자리에 들고 거실에 나 혼자 남았다. 거실창 너머로 보이는 산그림자가 나에게 묻는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고. 야산이 뿜어내는 음기는 머릿속을 온갖 나쁜 생각으로 물들였다. 부정적인 생각을 억지로 지우고 침대에 누웠지만 아내와 아이의 숨소리만이 들리는 적막한 고요가 가슴을 누르고 나를 옥죄인다. 잠이 오질 않는다. 정말 잠이 오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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