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
비가 오는 날이면 평소에는 찾지 않는 따뜻한 믹스 커피 한잔을 하곤 한다. 건물 옥상 간이 지붕 위로 가느다란 빗줄기가 똑똑 떨어지고, 달콤 쌉싸름한 믹스 커피 한 모금을 홀짝인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종이컵은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 아래에서 다 쓴 종이컵을 보고 있으면, 종이컵이나 내 신세나 비슷하게 느껴져 한탄스러울 때가 있다. 5분 남짓만에 효용을 다하고 구겨져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종이컵처럼 나 또한 금방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게 아닐까라는 걱정을 한다.
수많은 직장 선배들이 있었고, 어느샌가 하나 둘 퇴직을 했다. 어떤 분은 정년을 맞이해서, 또 어떤 분은 계약기간이 끝나서. 어떤 이유던지 퇴직자들은 어지간해서는 본인이 일하던 곳으로 얼굴을 다시 비추지 않는다. 처음 한 두 번은 반가워하지만 그 이상 보게 된다면 민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후배들도 또한 이런 선배들에게 잘 연락하지 않는다. 연락할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에서의 효용이 다 끝나고 난 선배들은 어떻게 지낼까? 직장이라는 방패막이 사라지고 가정으로 또는 다른 직장으로 나가게 된 선배들의 운명은 다 쓴 종이컵일까?
난 한번 쓰고 버려질 종이컵이 되기 싫다. 일회용이 아닌 단단하고 어디서든 재사용 가능한 텀블러가 되고 싶다. 그렇기에 이제는 직장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직장 업무 외에도 어떤 것이든 담아낼 수 있는 튼튼한 텀블러가 되기 위해서.
그래서 요즘은 직장과는 관계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보는 중이다. 온라인 독서모임도 참여해 보고, 퇴직 이후에 할 수 있는 직업과 관련된 자격증 공부도 시작한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기에 힘들지만 퇴직 이후에 쓸모없어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에 더 열심히 도전한다.
꾸깃꾸깃 접은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사무실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