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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나영

자살을 했다. 아는 사람 아파트에서 이 주 연속으로 누군가가 뛰어내렸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아파트에서도 누군가가 지난주에 뛰어내렸다고 했다. 집값이 떨어질까 봐 쉬쉬한단다.

03년 생인 어느 집 아들이 자살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와의 갈등을 이기지 못해 숨을 끊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갈등이 심했단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사건건 간섭을 했고 아들의 대학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들었다. 그는 친구를 부러워했다. 친구는 강원도에 있는 멀리 떨어진 대학으로 갔다. 부모 간섭 없이 마음대로 한 학기를 보냈다. 부모가 보내주는 용돈이 너무 적어서 강릉에 있는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공부보다는 아르바이트에 더 열심이었고 학생회나 동아리를 찾아다니며 술자리에 빠지지 않았다. 잔소리로부터 해방된 친구는 술도 원 없이 마셨다. 한 학기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간기능 개선제부터 찾아 챙겨 먹었다. 친구는 머리가 꽃밭인 친구들과 헤어지기로 했다. 친구는 같은 과에 공부하는 애가 한 명뿐이라고 취업을 준비하는 애들도 없다고 반수를 준비했고 다른 대학으로 입학했다. 강릉의 맑은 바람을 실컷 쐬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제주도, 일본 여행 경비로 썼다. 아버지의 등쌀을 못 이긴 아이는 친구의 자유가 몹시 부러웠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기에 잔소리 없는 친구의 부모님이 더 부러웠다.

나이가 사십이 넘은 아들은 아버지한테 인정을 받고 싶었다. 경영학과를 졸업하여 무역을 하고 싶었지만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자신의 건설업을 아들이 이어받길 바랐다. 아들은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았다.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매일 출근하는 아버지는 직원들이 보든 말든 아들한테 쌍소리를 아낌없이 퍼부었다. 일처리를 제대로 못한다고 타박을 하고 간섭을 했다. 그날도 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 이어졌을 거다. 사장실에서는 사장 아버지의 고성이 난무했고 아들은 숨죽이고 들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반항하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한마디 말도 없었고 하라는 대로 할 뿐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마음에 접어 두었고 나날이 술만 늘어갔다. 아들은 부인에게 아이들과 함께 잠시 장을 보고 오라고 했단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 집에 돌아왔을 때 부인은 세상을 떠난 남편을 만났다.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 쌍둥이와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 하나를 두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보내고 부인은 욕을 먹었다. 남편이 그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알지 못했냐고 시부모는 며느리를 욕했다. 그 사장 아버지는 아들의 장례식에 조카들을 줄지어 세웠다. 형이 이렇게 되도록 너희는 도대체 뭐를 했냐고 단체로 기합을 받았다.

자식이 잘 되는 집을 보면 아버지의 특징이 있단다. 아버지가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다정한 사람이거나 아예 아버지가 없는 집 자식들이 잘 된다고 김창옥 강사가 어느 강연에서 말했다. 우스개 소리 같지 않다. 아버지가 교육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집일수록 시끄러웠다. 자식이 똑바로 살기를 바란다고 자신의 틀로 가두려는 집일수록 자식들이 병들어 가는 모습을 더 많이 보았다. 날개를 펼치기도 전에 꺾어버리는 부모는 자식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자신의 조바심에 초조해서 타 죽을 지경이다. 내가 아는 세상에 갇혀서 사는 부모는 자식이 살아갈 세상을 존중하지 않는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는 아들 크로노스에게 거세를 당한다. 우주의 지배자가 된 크로노스는 자식에 의해 퇴위당할 거라는 신탁을 듣고 자식을 낳는 즉시 모두 잡아먹는다. 하지만 대지의 신 가이아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꺾고 인간과 신들의 지배자가 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꺾어야 왕좌를 차지한다. 신화의 이야기가 그냥 이야기만은 아닌 게 분명해 보인다. 삶의 단면을 상징하는 이야기일 거다. 아버지의 권위에 눌리면 아들은 기가 죽고 숨이 죽는 걸까? 아비를 꺾어야 아들은 날아오를 수 있는 걸까?

젊음은 비극적이다. 희망에 벅차서 날뛰지 않는다. 들끓는 열정에 비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어디로 방향키를 잡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배에서 풍랑을 만나고 태풍을 만나고 고요한 태풍의 눈 속에 들어앉아 있기도 하다. 곧 닥쳐올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불안이 정신을 잠식하기도 한다. 우울할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이십 대의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몰랐다. 이십 대의 내 사랑은 방황의 연속이었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과 세상이 보는 내가 달랐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마음대로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이십 대의 청춘에서 나는 수도 없이 절망했다. 무엇을 해도 잘 풀리지 않아서 주역과 각종 경전에 모두 매달렸다. 허무함에 젖은 나에게 주지스님은 '생명'이라는 화두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매일 백팔배를 하라는 부탁을 했다. 안 할 게 뻔해서 답을 안 하는 나에게 스님은 답이 나올 때까지 나를 기다렸다. 노력이라도 해보라는 말로 나를 다독였다. 스님을 만나고 돌아와서 나는 한 달 이상 백팔배를 했던 거 같다. 백팔배를 하는 동안 나는 잡념이 사라졌었다. 오직 나한테만 집중했을 뿐이다. 시큰거리는 무릎에 정신이 모아졌고 후들거리는 다리만 생각했다. 흐르는 땀에 오만 가지 생각들이 씻겨 내려갔고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내 몸 하나 주체하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이십 대를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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