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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베짱이

by 송나영

요즘 지인의 아들을 태워주느라 아침저녁 바쁘다. 동네에서 좀 떨어진 자사고에 입학했지만 그 아들은 기숙사에 들어가는 대신 등하교를 택했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모두 학교에서 먹기에 지인은 부엌에서 해방됐다. 나는 아들을 독립시켰고 지나치게 많아진 시간을 때워야 하는데 지인은 아직 고등학생인 아들 뒷바라지로 여가가 없었다. 지인이 며칠 등하교를 부탁했다.

오랜만에 새벽잠을 깬다.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는 새벽 기도 다닌다고 극성도 떨었는데 요즘엔 침대와 한 몸이 돼 8시가 다 돼야 겨우 일어나곤 했었다. 6시 20분에 집을 나서서 아이를 태우고 달린다. 도로에서 6시는 새벽도 아니다. 출근하느라 바쁜 직장인들과 통근 버스를 기다리는 회사원들을 보고 고속도로를 꽉 채운 출근 차들을 본다. 물류를 나르는 차들도 고속도로에서 시간을 다투며 질주한다. 7시를 조금 넘어 학교에 도착할 때쯤 아이는 차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다. 깨우기가 안쓰럽다.

아침잠이 많았던 내 아들도 아침마다 전쟁터에 끌려가듯 학교에 갔었다. 즐겁게 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밤새 수행을 준비할 때도 있었고 게임과 영화를 볼 때도 있었다. 아들과 게임으로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렀는지 모른다. 적당히 하기를 바랐지만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일이었다. 고1 때도 수시로 밤을 새웠었는데 생각해 보면 열심히 하느라 그랬던 건데 왜 잠을 안 자냐고 애를 다그친 적이 많았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혼부터 낸 거다. 그러니 아이와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언젠가 아이는 자기가 잠시 쉬려고 게임을 하면 딱 내가 방에 들어온다고 했다. 자기가 놀 때만 엄마가 와서 잔소리를 한다고 억울해했었다.

학교 근처에 다다르면 여자 아이들이 아직 선뜩한 새벽공기를 막으려고 허리 아래로 무릎담요를 두르고 등교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7시 조금 넘은 시간인데 아이들이 씩씩하게 학교로 걸어 올라간다. 잠깐 눈을 붙였던 아이도 학교에 도착하면 반사적으로 일어난다. 저녁에 학원 수업까지 마치면 10시가 넘어야 오늘 하루가 끝날 거다. 학교 가는 길에 하루 사이로 활짝 핀 벚꽃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며 생각해 보니 나도 그랬다. 우리 때는 0교시라고 해서 아침 7시까지 학교를 갔었다. 그리고 야자까지 하면 밤 11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70년대 80년대의 어른들은 경제를 일으키느라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지만 학생들도 새벽부터 밤까지 공부한다고 참 열심히 산 거다. 새벽공기를 가르고 도서관을 다니고 열지도 않은 도서관 앞에서 줄을 서고 기다렸었다. 캄캄한 시간에 혼자 뿌듯해했다.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구나.

우리 때는 개미와 베짱이가 교과서에 실렸었고 놀기만 하는 베짱이를 죄악시했던 세대다. 아닌가? 내가 이솝우화에서 읽은 것인가? 내 석연치 않은 기억에는 꼭 교과서에서 배운 것만 같다. 왜 유독 개미와 베짱이만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다. 베짱이 기질이 있는 내가 찔렸었나? 개미처럼 부지런하게 살아야 겨울도 나고 궁핍하게 살지 않는다고 했다. 베짱이가 신나게 노래 부르고 놀다가 한겨울이 닥쳐오자 누더기를 걸치고 개미를 찾아온 그림이 기억난다. 나무에 턱 기대앉아서 기타 치고 노느라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준비하지 않은 베짱이의 가난을 너무 당연한 걸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쁜 죄로 배웠다.

며칠 전 후배한테 자기만 놀고 있는 거 같다고 죄의식이 느껴진다는 말을 들었다. 후배는 무언가를 해보려고 끊임없이 생각한다. 성과가 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우리가 놀기만 한 결과처럼 교육받은 거다. 베짱이가 작곡을 하느라 느긋할 수도 있는 거고 여유를 즐기고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일만 하는 개미를 위해 문화생활도 즐기게 해 줬는데 너무 억울한 평가를 받은 거다.

우리는 노는 게 제일 좋다는 뽀로로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자랐다. 그런 교육을 받아서인지 시간이 나서 느긋해지면 괜히 마음 한 편이 불편해진다. 그럴 일이 아닌데 여유를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 천천히 느긋하게 지내도 되련만 머리에 새겨진 근면, 성실의 교훈은 아직도 각인이 굳세다.

새벽부터 돌아다니니 시간이 넘쳐난다. 밭에도 가보고 도서관도 기웃거렸다. 밭에는 노인들이 벌써 일을 한다. 비닐하우스를 열고 들어가서 이 주 전에 심어 놓은 푸성귀를 오래간만에 만났다. 매일 물 주는 일은 지인의 아버님이 하신다. 일주일에 한 번씩 들여다보는 일로 나와 지인은 뿌듯해하고 있었다. 왜 물 주지 않냐고 묻는 아버님 말씀에 지인은 내가 아프다고 둘러댔다고 했다. 매일 같이 밭에 가자고 하실까 봐 두려워서다. 우린 베짱이라 잘 맞는다. 도서관에도 나이 든 사람들이 반이상이다. 부지런한 개미들이 세상을 일궈간다. 집에서 나 혼자 지내다 보면 시간을 못 느낄 때가 많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으면 벌써 오후가 시작될 때도 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면 시간이 느껴진다. 더 열심히 살겠다는 각오도 생긴다. 할 일이 마구 생각난다. 이런 마음이 베짱이인 나로서는 며칠 갈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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