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나 여태 세탁기 세정제 한 통을 다 부었는데 십 분의 일만 붓는 거였다. 50미리 용량만 넣으라고 설명서에 적혀있었다. 난 본 적이 없다. 아니 보지를 않는다.
사용설명서를 당최 읽지를 않았다. 모든 설명서를 무시하고 무대뽀 정신으로 그냥 막 돌리고 막 넣는다. 신중하지 못한 내 성격과 급한 내 성질이 상승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내비를 켜 놓고도 그것대로 간 적이 별로 없다. 오죽하면 교차로에서 나가야 할 길을 자주 놓치곤 해서 아들이 엄마는 지도를 안 보는 거냐는 타박도 들었다.
설명서를 읽지 않아서 생각지도 못한 임상실험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상은 주로 가족이다. 아이가 어려서 열이 무척 올랐었다. 애가 너무 달아올라서 해열제를 급하게 먹였다. 빨갛게 달았던 아이가 순식간에 맑은 피부색으로 돌아왔다. 약이 너무 효과가 좋아서 깜짝 놀랐다. 이렇게 열이 빨리 떨어지나? 그제야 해열제 용량을 확인했었다. 내가 서너 배 이상을 먹인 거였다. 기겁을 했지만 일단 애가 너무 편안해서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불안한 마음을 접었다.
아이가 더 어려서 깔끔을 떤다고 생리식염수에 공갈젖꼭지를 담갔다가 줬는데 아이가 온몸을 떨었다. 왜 그런지 몰라 식염수를 맛보니 짜다. 애 아빠한테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 내 책임이다. 우리 애는 두유를 먹지 않는다. 두유는 내 임상실험의 희생양이 된 거다. 조리원에서 만난 엄마들이 두유를 먹인다고 했다. 도전정신은 넘치고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나는 아무 두유나 샀다. 그리곤 설명을 듣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지도 않았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에게 두유 한 통을 부어줬다. 분유만 먹던 아이는 두유를 한 입 빨아먹고는 퉤 하면서 얼굴을 돌려버렸다. 두유가 싫은가 보다며 단순히 생각했는데 주변에 물어보니 두유 양을 조금씩 차츰 늘려가야 한다고 했다. 두유 원액만 처음부터 먹이면 안 된다고 했다. 가뜩이나 까다롭고 예민한 아인데 확 바꿔버렸으니 애가 놀랄 만도 하다.
아버지는 나에게 왜 애를 위험하게 두냐는 말도 하셨다. 애가 젓가락을 갖고 놀고 있었는데 나는 제지하지 않았다. 동생과 아빠는 기겁을 했다. 왜 애한테 젓가락을 주냐고 애가 눈이라도 찌르면 어쩌냐는 것이다. 나는 아무리 갓난 애라도 그런 바보짓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느닷없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 같다. 아들도 호기심이 많았다. 밥을 할 때면 꼭 자기를 업고 보여달래서 음식을 끓일 때마다 아이를 등에 업었다. 서너 살이 돼서는 내 칼질이 궁금했던 거 같다. 만약 우리 식구들이 봤으면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을 거지만 나는 아이에게 과도를 쥐어줬다. 아이는 손 안 다치게, 나보다 더 조심스럽게 잘랐다.
얼마 전부터 사용설명서를 읽는다. 일단 내 멋대로 해보다가 알게 된 방법으로 막 사용했었는데 점점 몸이 힘이 들어진 거다. 손힘도 약해졌다. 손 힘이 세서 멀쩡한 가구며 부속품을 부러뜨리곤 했었다. 내 멋대로 하다가 호되게 힘든 일이 생겼다. 뒷베란다 광문을 새로 바꿔 달았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살다 보니 문을 끼운 한쪽 문틀사이의 벽 틈새가 마구 부서져 있었다. 인테리어 할 때 얘기를 했어야 하는데 이 년이나 지나서 애프터서비스를 부르기가 민망했다. 볼 때마다 눈에 거슬려서 실리콘으로 메꾸려고 마음먹었다. 다이소에 가서 실리콘을 몇 개 사 왔다. 실리콘을 눌러서 짜는데 손이 떨어져 나가게 아팠다. 이걸 어떻게 쓰라고 이렇게 만들었냐고 투덜거렸다. 실리콘 뚜껑을 따고 끼운 플라스틱 주둥이로 실리콘이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주둥이도 길어서 조금이라도 나오려면 죽을힘을 써가며 했다. 주둥이를 잘랐다. 좀 낫겠다고 생각한 바와 달리 여전히 힘이 들었다. 용을 쓰고 난리를 치다가 그제야 실리콘 옆구리에 있는 그림을 봤다. 실리콘 건에 실리콘을 끼우고 쓰라는 거다. 내가 여태 뭘 한 거지? 이렇게 무식할 수가 없다. 다이소로 바로 달려갔다. 실리콘 건을 사서 실리콘을 끼우고 총을 쏘듯 방아쇠를 당기니 술술 나온다. 힘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렇게 쉽게 되는 일을 갖고 나 혼자 온갖 용을 쓴 거다. 설명서 잠깐 읽으면 쉬었을 텐데 그거 읽기 귀찮아서 무시하다가 된통 당했다.
이제는 힘이 들어서 머리를 잘 써야 한다. 일을 쉽게 하려면 요령을 잘 익혀서 쉽게 해야 한다. 설명서가 필수다. 어떻게 하라고 쓴 대로 용량도 맞추고 시키는 대로 한다. 하라는 대로 안 하는 내가 이제야 남의 말을 듣는다. 시키는 대로 하니까 편하다. 남의 말도 귀담아들으면 몸이 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