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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나영 Mar 17. 2024

치매

  미안하다. 30년 이상을 헤어졌던 딸을 처음으로 알아봤다. 내가 정말 미안하다. 미국에서 온 막내이모와 함께 새벽에 울음바다를 이뤘다. 큰이모는 어머니를 어머니라 하지 않았다. 이 아줌마 왜 이러니? 왜 자꾸 나한테 며느리가 밥을 안 준다고 하니? 기억을 놓아버린 외할머니는 며느리를 무서워했다. 그리고 큰이모를 졸졸 따라다녔다.

  큰이모는 아들 하나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이모가 왜 미국으로 갔는지 들은 적이 없다. 다만 큰이모가 외할머니의 구박덩이였다는 사실은 안다. 학교도 보내지 않고 살림밑천으로 부렸다는 것만 알고 있다. 외할머니는 보령 오 진사댁 막내딸로 태어났다. 불행은 외할머니의 동반자였다. 태어나 바로 열병을 앓는 바람에 한쪽 눈이 백내장으로 하얬다. 딸만 줄줄이 일곱이라 외증조부는 첩을 얻었고 외할머니 밑으로 드디어 아들을 얻었다. 외할머니는 어렵사리 시집을 갔다. 다른 딸들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지만 한 눈에 백태가 낀 외할머니는 몰락한 양반 끝자락을 남편으로 얻었다. 다 찌그러진 집에 몸종을 데리고 살 수가 없어 시집간 첫날에 친정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어찌나 가난했던지 끼니를 잇기 힘든 형편이었다. 동경 유학까지 다녀와 한의사를 했다던 외할아버지는 한량이었다. 사람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온 동네 사람들 퍼 먹이기 좋아해 외할머니는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외할머니의 한풀이 대상이 큰이모였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애절한 큰이모의 노랫소리는 진주난봉가로 이어졌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 년 만에.. 삼십 년도 넘게 어디 사는지,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자매들은 술상을 앞에 두고 지나온 세월을 노래로 대신했다. 술 한 잔 할 줄 몰랐던 큰이모의 구슬픈 목소리는 이모의 삶을 닮았다. 전쟁통에 부여로 피난살이를 떠났다 다시 황학동 한약방 골목으로 돌아왔고 큰이모는 신당동 중앙시장에서 풀빵을 팔았다. 국화빵이 얼마나 잘 팔렸는지 외할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생계를 책임졌다. 저녁이면 그 풀빵으로 온 식구가 잔치를 했다. 그 후에 큰이모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물건을 팔았던 거 같다. 너 돈 냄새가 얼마나 심한 줄 아니? 돈이 너무 셀 수 없이 많아 돈다발로 목침을 만들어서 베고 잤다고 했다.

  큰이모는 삼십여 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 식구들을 찾고 싶었지만 경찰서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글자 한자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큰이모는 미국에서 같이 나온 친구를 따라 그이가 하자는 대로 따라다녔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날에 엄마의 가게 앞을 우연히 지났다. 엄마는 큰이모를 모시고 집으로 왔고 외가 식구들은 다들 놀랐다. 기억을 잃어버린 외할머니는 생판 남인 아줌마를 만나 기억에 남아있는 내 뒤로 숨었다. 생사도 모르고 살던 큰이모는 다시 오겠다는 말과 함께 시카고에 살고 있다는 막내 이모의 연락처를 받아서 한 달 뒤에 막내이모를 데리고 미국에서 다시 나왔다. 외할머니는 큰이모를 기억하지 못했다. 큰이모도 어머니라 부르지 않았다. 이 아줌마라 했다. 그 아줌마는 큰이모한테 뭐에 끌리는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간간히 기억하는 막내딸은 본 체 만 체하고 모르는 아줌마만 의지했다.  

  큰이모가 떠나기 며칠 전 새벽에 외할머니는 홀연히 일어나 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딸이 돌아왔다. 구박만 했던 큰딸이 돌아온 것이다. 외할머니는 큰이모의 뺨을 어루만지며 맑은 정신으로 또렷이 말씀하셨다. 미안하다고. 내가 정말 미안하다고. 큰이모만 빼고 모두 꺽꺽거리고 우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왜 큰이모가 울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나는 궁금하다. 새벽 동이 터오고 외할머니는 다시 잠에 들었다. 그리고 기억이 사라졌다. 기적 같던 새벽 그 찰나는 이슬로 사라졌다. 큰이모가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를 구박한다고 큰외숙모를 무척 미워했다는 말을 얼마 전에 들었다. 큰이모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도 여전히 이 아줌마라고 불렀는데 말이다. 큰이모가 떠난 지 얼마 후에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큰이모는 위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 너무 슬퍼서 뚜껑 열린 파란색 스포츠카를 몰고 매일 남편의 묘지를 갔다던 큰이모는 일 년 뒤에 세상의 소풍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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