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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나영 Mar 21. 2024

나는 나

  오래전에 읽었던 책 제목이었던 거 같다. 나는 나. 다른 여성 해방 작가와 달리 남성과 대척점에 있지 않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덜 피로했다.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것은 나답게 살고자 했던 작가가 결국 여성해방론자 집단에서 나와 자기만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나답게 살면 되지. 하지만 그 나답게는 어렵다. 여자가 이래야지, 엄마가 이래야지, 아내가 이래야지, 딸이라면 이래야지. 완고한 세상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역할에 충실하기를 기대한다. 세상 피곤한 일이다. 나를 풀어헤쳐 놓을 수가 없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납득이 안 가는데 그래야 한단다. 공존을 위한 사회 규범에 얽매여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같이 살기가 힘들어진다.

  잘하려고 하면 힘이 들게 마련이다. 어느 사회나 잘하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만 잘하면 되는데 남들 못하는 꼴을 보지를 못한다. 그러니 힘이 배는 든다. 종교 집단도 마찬가지다. 어느 기도 모임에 친한 형님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 가입했다. 동갑내기인 자매님이 불경스럽게 책을 바닥에 둔 채 읽었다고 빨리 손에 들고 읽으란다. 갈 때마다 지적질을 했다. 기도 모임을 오래 했던 그녀의 자격은 신입의 거슬린 행동을 지적할만했다.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하고 왜 그리 세상을 불편하게 사는지 모를 일이다. 모임이 끝나고 누군가 한턱을 내겠다고 우르르 식당에 몰려갔다. 방금 마음을 닦는다고 기도하면 뭐 하나? 음식값을 내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맛을 품평한다. 오랜 주부 경력을 가진 자매님들은 다들 맛에 일가견이 있으시다. 처음으로 그 자리에 껴서 그들의 말습관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불편했다. 익숙해지면 말의 경계가 없어진다.

  나의 옹졸함의 전통은 유구하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했던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옹졸하게 가슴에 담아 둔 말들이 많다. 툭툭 털어버리고 잊어버리면 되는데 나는 그게 쉽지 않은 사람이란 것을 오십이 넘어서야 알게 됐다.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종지만 한 가슴에 담아두고 끙끙 댄다. 사는 게 바빠서 잊어버렸던 것이다. 행동이 느려지고 생각이 느려지니까 툭툭 하나씩 나를 건드린다. 고구마줄기처럼 딸려 올라온다. 때로는 고독이, 슬픔이, 나이 든 서글픔이 마음에 번진다.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됐다. 갱년기 탓이라고 하고, 나이가 들어서라고 하지만 끝도 없는 우울감에 폭삭 가라앉을 때도 있다. 의학정보는 나를 살려주지 못한다. 출렁거리는 감정에서 빠져나오기도 힘들다. 툭툭 떨어지는 눈물에 내가 왜 이러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답을 찾지만 엉켜 나오는 감정을 막을 수가 없다.

  내 감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슬픔을 인정하고 우울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동안 나 참 열심히 살았다고 고통의 시간을 잘 버텼고 앞으로도 잘 버텨낼 거라고 다짐을 해도 마음은 그대로 늪에 남아있다. 내 머리는 어떻게 할지 아는데 내 마음이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바꿔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외롭고 슬펐다. 단순한 내가 가끔 한없이 복잡해지는 것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은 걸로 치장하지 않으려고 했다. 슬프면 슬픈 대로 우울한 노래를 듣고 한바탕 울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닌 척하려니 힘이 들었다. 아들이 떠난 빈자리가 허전할 때 송소희의 '보고 싶다'가 나를 울렸다. 툭 떨어지는 눈물에 익숙해지고 그 끝에 오는 시원한 감정도 익숙해진다. 늘 혼자 집에서 지내던 아빠가 외로운지 몰랐다. 당신은 고독하고 심심하지 않은 줄 알았다. 나이 든 노인은 그냥 사는 줄 알았다. 묵묵히 나를 지켜봤던 아빠의 외로움이 절절히 느껴질 때 정미조가 부른 '어른'을 들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피터 한트케가 쓴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단편집에는 독거노인들이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심심해서 이름을 바꿔 부르다가 오히려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소외되고, 모험을 떠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는 데만 하세월이 걸린 사람 등등 그들은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다양한 일을 벌인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가족이 나오지 않는다. 고독한 노인들이 주인공인 것이다.

  스마트폰을 누구나 쓰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LG 유플러스 불났어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할머니는 아마 본인이 고객센터에 전화한 것을 몰랐을 것이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전화가 걸렸을 것이고 고객센터 직원의 친절한 응대에 당황했다. 당신은 'LG 유플러스'라는 단어를 몰랐다. '유플러스'를 '불났어요'로 알아 들었다. 고객센터라는 단어는 할머니에게는 목욕센타라는 말로 들렸다. 거기가 뭐 하는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아는 말과 단어가 세상을 이룬다. 이상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노인의 말이 서글펐다. 웃기지 않았다. 아주 웃긴 얘기가 있다고 애들이 들려줬지만 우습지 않았다. 그 노인이 소외된 세상이 보였다.

  나는 늙어간다. 살이 출렁거리고 생각이 느려지고 행동도 느려진다. 예전에는 왜 못하냐고 다그쳤던 것을 이제는 지켜보게 된다. 힘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프다. 달라지는 것을 아직 못 받아들인다. 이제 남은 사오십 년을 살아야 한다. 재수 없으면 백을 넘을지 모른다. 할 일도 없이 하루 종일 심심한 시간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버지처럼 9년을 누워서 지낼지도 모른다. 아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기뻤다. 긴 고통의 시간을 드디어 끝냈다는 사실에 슬프지만은 않았다. 이별의 슬픔보다 하루 종일 혼자 누워 지낸 고독이 끝난 기쁨이 훨씬 컸다. 내 다리로 걷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하고 우울하게 지내지 않기 위해 사회 활동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움직이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온전히 나를 받아들이고 싶다. 세상 귀찮아하는 나 자신을 그대로 놔두고 싶다. 그동안 너무 나 자신을 들볶으며 살았다. 남들 다 자는 시간을 아끼고 남들 노는 시간을 아끼도록 나를 몰아붙였다. 그동안 수고한 나를 좀 놔줘야겠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고 파우스트에 적혀있다. 나는 지금 남은 생을 살기 위해 방황을 하고 있다. 사춘기와 갱년기는 또 다르다. 뿌듯하기도 하지만 슬프고 서럽고 외롭다. 좋은, 행복한 기억보다 서글픔이 더 크다. 감수성에 젖어 막연히 우울했던 거와 다르다. 세상에 덩그마니 나 혼자 남겨진 거 같던 외로움과는 또 다른 고독이다. 이제는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도 알고 진정한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것을 알기에 느끼는 외로움이다. 바삐 사느라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서로 나오겠다고 아우성을 친다. 기쁨과 즐거움만 나오지 않는다. 나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는데,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해봤는데도 행복한 감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울하고 서글프고 서러운 감정들이 꼬리가 길다. 그게 다 나오면 웃음과 즐거움도 나오겠지. 이 또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니 실컷 누려야겠다. 나를 온전히 마음껏 풀어지도록 내버려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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