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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나영 Sep 26. 2024

아들의 첫 정장

  아들은 옷에 관심이 많다. 부모는 모두 편한 옷만 걸치는 사람들인데 아들은 다르다. 어느 날 정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장례식 갈 일도 많아지고, 격식을 차리는 자리가 생기는 거였다. 슬리퍼만 신고 옷에 대한 관심이 줄면서 운동복 같은 옷만 입고 다니더니 이제 가끔 차려입을 때가 생겼다.

  아들과 취향이 많이 달라서 내가 골라준 옷은 늘 별로인 것으로 취급받았다. 중학교 때는 포인트가 있는 옷이 좋다고 티셔츠를 고르면서 자신의 확고한 취향을 나한테 각인시켜 줬다. 옷을 사다 주려면 사진을 찍어서 이건 어떠냐 저건 어떠냐 물어봤다. 대답은 한결같이 자기 옷은 자기가 고른다고 선을 그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는 저가 알아서 계절마다 옷을 사러 다녔다. 튼튼하고 오래 입는 브랜드 옷을 선호하는 나와 달리 아들은 인터넷으로 저렴한 옷을 주로 샀다. 옷값이 아깝다지만 철마다 사는 양을 보면 옷값을 아까워하는 거 같진 않다.

  성묘를 다녀오면서 옷을 사러 갔다. 아무리 추석이라도 연 곳이 있겠지. 아웃렛 매장을 찾았다. 남성 정장을 산 적이 별로 없어서 낯설었다. 아들의 정장을 사러 가니 더더욱 낯설다. 추석이라 점원에게 가게를 맡길 수 없어 주인이 직접 나왔다고 했다. 사장은 정통 클래식 정장부터 입혔다. 조끼까지 갖춰 입히니 어색해도 너무 어색하다. 애늙은이 같고 옷도 겉돌고 해서 나가려는데 사장님이 어찌나 정성스럽게 옷을 권하고 수발을 들어주던지 미안해서 하마터면 그냥 살 뻔했다. 점심 예약 시간이 촉박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아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여태 못 들었던 아들의 근황을 들었다. 같이 살 때는 어디 가냐고 묻기만 해도 불편한 기색이더니 따로 살면서는 어디 갔다 왔다고 얘기도 하고 사진도 보여준다. 자기가 다닌 맛집 사진을 보여주면서 여기는 어떻다고 알려준다. 피는 못 속인다고 맛있는 집 찾아다니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나를 꼭 닮았다.

  서로 시간 있을 때 가자고 아웃렛 매장을 다시 찾아 나섰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꽤 있었다. 구두부터 사러 갔다. 여러 가게를 들락날락 한 끝에 둘 다 마음에 드는 구두를 발견했다. 구두가게 사장님에게 남자 정장을 얘기했더니 이 삼십 대가 입는 남성 정장 브랜드를 추천했다. 내가 아는 브랜드는 연식이 오래된 클래식 차 같았다. 아들과 그 가게로 향했다. 가게에 나처럼 엄마가 아들이랑 정장을 사러 온 집이 몇 있어서 말을 걸어주는 점원이 없었다. 뭘 골라야 하나 망연해 있는데 중장년층으로 보이는 분이 옷을 턱턱 골라준다. 처음에 간 곳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이제 좀 나이에 맞는 옷을 입으니 아들이 번듯해 보인다. 아들도 마음에 들었는지 군소리가 없다.

  아들과 나는 각자 집으로 향했다. 길이 밀리면서 내가 처음으로 남자 정장을 사러 간 기억이 떠올랐다. 스무 살 무렵에 처음 사귀었던 남자친구와 같이 정장을 사러 동대문에 갔었다. 그의 어머니가 여자친구랑 같이 사라고 했다. 아직도 그 촌스러운 하늘색 정장이 눈에 선하다. 집에 남자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도 정장을 잘 안 입으시니 정장을 고를 줄도 모르고 살 줄도 몰랐던 거다. 왜 걔네 엄마는 나랑 같이 사라고 했을까? 양복을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당신 딴에는 그래도 젊은 애들이 잘 고를 거라고 생각하셨나? 하지만 난 경험도 없고 뭐가 잘 어울리는지 볼 눈썰미도 없었다. 동대문 쇼핑센터에서 남자 양복이 가득한 곳에 들어가 남자친구에게 어울릴 만한 것을 찾았지만 내 눈은 지쳐갔다. 아무거나 고르고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했었다. 아마도 이맘때였던가 아니면 좀 더 더웠던가 여름 정장을 골랐고 그나마 그게 제일 낫다고 고른 거 같다. 그 옷을 입었었나? 그 하늘색 정장 웃옷을 입은 남자친구의 모습이 기억에 남지 않은 거 보면 별로 입지 않았던 거 같다. 그리고 내가 고른 두 번째 남자 정장은 결혼을 준비할 때였다. 점원이 알아서 골라줬고 수월하게 골랐던 거 같다. 돈이 좋긴 좋다. 가격대가 올라가니까 아무래도 촌스러움은 덜어지는 거 같다. 촌스럽기 짝이 없던 영감 같거나, 가수처럼 보이던 하늘색 양복을 고른 눈이 좀 나아졌다.

  스물몇 해만에 남자 정장을 다시 고른다. 아들의 첫 정장도 여전히 어색하지만 처음으로 아들과 마음이 맞아 옷을 골랐다. 내 취향과 아들 취향이 오래간만에 통했다. 아들이 이만큼 컸구나. 정장이 필요할 만큼 자랐다는 걸 새삼 느낀다. 정장을 빼입은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했다. 옷이 날개라더니 아들이 멋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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