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면 잠도 못 잤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말했단다.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내가 뭔가 실수한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난인 건지, 비판인 건지 도무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그 말을 곱씹었다. 분명히 상처를 주려고 한 말은 아닌데 상처를 받은 것처럼 들렸다.
친구네도 남편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한참 힘들어했다. 큰애는 대입을 앞두고 있고 둘째는 고등학교를 올라가는 시기여서 경제적인 아쉬움이 더 컸다. 가정주부로만 살다가 처음으로 직장에 다니게 됐지만 남편과 갈등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20년이나 경력이 단절된 주부로만 살다가 직장생활을 하려니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할 때였다. 이럴 때 희한하게 남편은 정작 남의 편이 된다. 한 편이 돼도 살 둥 말 둥 하는데 생활비 벌러 나간 마누라한테 시비를 건다. 저녁에 늦게 들어온다고 현관문을 잠가 아들이 따로 연락을 해줬단다. 회식으로 늦게 들어간 날은 발로 밤새도록 시비를 걸었다고 했다.
남보다 못한 남편의 상황은 우리 집도 비슷했다. 10여 년이 넘도록 해오던 중장비 대여업을 한순간에 정리하고 무엇에 씐 사람처럼 주식투자를 하려고 몰래 오피스텔을 얻었었다. 오피스텔을 얻어서 마누라 눈치 안 보고 실컷 주식 투자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괜한 소리가 듣기 싫었을 거다. 가족을 위한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억울한 소리는 내가 들었다. 주식이 불장이라고 난리를 쳤던 시기에 사업을 늦게 정리해서 손해를 봤다고 했다. 게다가 10년간 열심히 일했으니 1년 이상 놀겠다고 했다. 대책 없는 남편을 두고 싸움만 커져갔고 나는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오피스텔 얻을 돈은 있고 생활비를 줄 돈은 없었다. 얼마 벌지 못하는 내 수입은 관리비며 식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헤어지면서 주식에 미쳤던 그 당시를 자신은 영혼을 잃었다는 기가 막힌 말로 얼버무렸다. 야비하게 말이다. 주식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투자가 실패를 한 것도 알고 있었고 사업을 정리하면서 현금을 얼마나 갖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회계를 봐주던 친척아주머니에게 사업을 정리하면서 얼마를 남겼는지 전해 들었는데 말이다. 그는 집을 넘겨주는 대신 이혼만은 안 하고 싶다고 했다. 과거 우리 가정이 깨지게 된 계기를 자신의 방황으로 생뚱맞게 각색해서 추억했다. 카톡으로 보낸 장문의 서사에는 미안함은 단 한 자도 없었다. 이혼을 마침표로 찍고 싶은 나는 또다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내 분노를 다 표현했다가는 행여 10여 년이 넘도록 기다린 이혼을 망칠까 봐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친구에게 나라면 잠도 못 잤을 텐데 넌 어떻게 했냐는 식으로 말했을 리가 없었다. 얘가 왜 이렇게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뭔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하니 내가 말실수를 한 거 같았다. 나 또한 저와 비슷하게 힘들었고 버텼는데 말이다. 그날은 헤어져서 집에 와서 내가 한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왜 그런 말을 했지? 어떤 상황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
오해가 풀렸다.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점심을 먹으며 얘기를 했다. 먼저 그 말을 꺼냈다. 자신의 삶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내가 그 말을 할 수 있었던 거란다. 내 의도를 알아주니 너무 고마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다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의아해한단다. 공감이 아닌 상처를 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던 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차마 주변 사람들에게는 속속들이 말하지 못하는데 처지가 비슷하다 보니 나한테 한숨 나오는 사연을 얘기했고 그걸 이해하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거 아니겠냐고 전해줬다. 다행이었다. 나도 그 말을 듣고 왜 그런 말을 했지 고민했는데 아마 네가 잘 버티고 있어서, 나라면 한숨도 못 잘 정도로 힘들었을 텐데 네가 잘 버티고 있다는 뜻으로 말했을 거라고 했다. 오히려 내가 고마웠다. 다시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아마 난 오해한 채로 그대로 묻었을 거다. 굳이 그 말을 꺼내 시비를 가릴 필요도 없고 조심하려고 더 말을 아꼈을 거다.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릴 때가 있다. 내가 한 말인데도 넘어가지 않고 걸려있다. 내가 한 말도 오해하고 남에게 들은 말도 그 뜻을 이해하지 않고 들어서 쉽게 오해한다. 얼마나 많은 말을 제대로 거르지 않고 가슴에 묵히고 있는지 모르겠다. 먼저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그 말 또한 가슴에 하나 얹어두고 있었을 거다. 쉽게 할 수 있는 그 말이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