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감정이라고 배워왔다.
그래서 불안해지면 이렇게 말한다.
“요즘 내가 좀 예민해.”
“마음이 약해진 것 같아.”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는다.
문제는 불안을 느끼는 게 아니라,
불안이 말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있다는 것이라는 걸.
불안은 늘 말을 건다.
“지금 이 상태는 좀 위험해.”
“뭔가 빨리 해야 할 것 같아.”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우리는 이 목소리를
그냥 생각이라고,
내 판단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불안이 오면
곧장 움직이려 든다.
지금 상태를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모두들 자기 세계를 잘 꾸려가는 것 같은데
나만 혼자 남겨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급해지고 숨이 짧아진다.
하지만 이 불안은
내가 부족하다는 증거라기보다,
연결에 예민해졌다는 신호에 가깝다.
두통이 병이 아니라 몸의 신호이듯,
이 불안도 삶이 틀렸다는 진단은 아니다.
불안을 믿는다는 건
불안을 없애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불안을 믿는다는 건
이 생각과 연결된다.
“이 불안은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한다.”
마치 두통이 오자마자
“아, 또 두통이네. 약부터 먹어야겠다” 하고
이유는 살펴보지도 않은 채
그냥 없애려 드는 것처럼.
불안도 그렇게 다룬다.
왜 생겼는지 묻기 전에
빨리 눌러야 할 문제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두통은 대부분
약을 먹기 전에
몸이 뭘 말하고 있는지부터
들어야 하는 신호다.
불안도 마찬가지다.
삶이 무너졌다는 증거가 아니라,
속도나 방향이 조금 어긋났다는 표시에 가깝다.
문제는
그 신호를 병으로 착각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불안이 있으면 안 된다고 믿는 순간,
불안은 관리해야 할 대상이 되고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다룰수록
불안은 더 자주 돌아온다.
불안을 믿지 않는다는 건
불안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상태다.
“아, 지금 좀 불안하구나.”
“이 불안이 뭘 말하려는 걸까?”
“이 생각은 사실일까, 아니면 반응일까?”
이 질문 사이에
아주 작은 여유가 생긴다.
그 틈이
숨 쉴 자리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질 필요도 없다.
다만
불안이 방향을 결정하게 두지 않는 것,
그게 삶을 안착시키는 기술이다.
불안을 믿지 않는다는 건
불안을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불안과 함께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불안은 병이 아니다.
불안은 두통이다.
그리고 두통이 그렇듯,
없애려 할수록 남고
의미를 들여다볼 때
조용해진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아도 된다.
다만, 믿지 않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