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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남 Apr 27. 2024

한국 남자가 주부로 산다는 것(2)

그 남자의 불금

그녀가 출근을 준비한다.


팟!


나는 밤새 잠을 뒤척인 탓에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는.. 하고 생각하는 찰나.

그녀는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곧장 스위치를 향해 전력질주를 한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의 LED  불을 확! 켜버린 후 쌩~ 하고 방을 나간다.  참 스윗한 사람이다. 얼른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라는 배려가 몸에 밴 행동이다.


평소 같으면 아침 6시에 내가 먼저 일어난다. 암막커튼으로 인해 어둠 속의 대화에 온 듯한 공간에서 슬며시 빠져나온다. 혹시나 그녀가 깰까 도둑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기고, 소리 없이 방문을 닫은 후 거실의 주황색 보조 조명을 켜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서로를 배려하는 우리는 아름다운 커플이다.'


자기 세뇌와 함께 세수를 시작한다. 이내 곧 그녀는 출근을 한다. 평소 재택근무를 하는 그녀의 회사 출근날, 오늘은 금요일이다.


"오늘 불금이구만.”


현재 시각 아침 8시 38분, 활활 불타오르게 될 오늘의 예상 마감 시간은 오후 6시.(회식을 하면 밤 8~9시는 되겠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9시간 22분. 충분하다.

 

다만, 그녀는 이미 방, 거실, 옷방 등 온 집안의 불이란 불은 다 켜놓고 가버렸다. 그녀의 흔적(머리카락, 메이크업 면봉)이 나의 날카로운 레이더에 포착되었으니, 일단 책상을 정리하고 바닥을 청소해 주며 나를 위한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준다. 주방의 설거지를 끝낸 그릇과 수저는 이미 찬장 정리를 어젯밤에 끝내놓고 잠이 들었다. 지난 글에 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주부의 일이 늘 그렇듯 반복 아니겠는가. 그녀의 회사 일도 지루한 반복의 연속일 것이다. 아무튼 오늘 기분은 유달리 상쾌하다.


'어쨌든 Friday Morning이니까!'


먼저, 아침 식사로 9시간 걸려 만든 요거트에 냉동 트리플베리를 듬뿍 올려 준비하고, 독서대에 책을 올린다. 아침 글로 뇌를 깨워주어야 하루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갈 수 있다.


그 사이 유혹거리를 벌써 한 번 이겨냈다. 농심의 신제품 푸팟퐁구리를 사두었는데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그녀가 없는 시간, 나 혼자 홀라당 먹어버리면 이후에 닥칠 시련과 고난이 두렵다. 배신의 말로는 늘 처참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했다. 또, 항시 나의 건강을 신경 쓰는 그녀의 마음을 상기시키며 아침 식사만이라도 건강하게 시작한 나를 칭찬한다.


책을 읽고, 출간을 목표로 하는 글을 쓴다. 최근 와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단계의 사람들을 위한, 쉬운 와인 책을 준비 중이다. 과거 초보자를 위한 와인 교육, 모임을 개설해 운영했었다. 모임을 계기로 홍대에 작은 와인 바를 창업했더랬다. 나를 위한, 내 안의 잠든 용 대신 기억을 깨워서 기록하는 일이다. 기왕 쓸 거 읽을 대상이 있으면 굳이 불필요한 내용은 사각사각 오려낼 수 있겠지.


오전 11시 42분, 배가 고프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일탈의 시작이다. 냉동실에 얼려둔 돈까스, 생선까스, 풀무원의 지구식단 두부텐더를 오븐에 굽는다. 풀무원 요새 일 정말 잘한다. 특히 두부텐더랑 두부강정이 식감과 향이 훌륭하고 속이 가벼워서 계속 쟁여두고 먹게 된다. 흑미밥을 꺼내어 그 위에 3분 차오차이 짜장을 얹힌다. 종류별로 사놓았는데 자극적이고 맛이 좋아서 계속 먹고 싶었다. 오늘은 스파이시블랙페퍼짜장이다.


‘먹방이란 이런 거지~’


점심을 먹은 후 설거지를 하려는데 싱크대 물이 안 내려간다. 트래펑을 때려부었는데도 안 내려간다. 무언가 잘못됐다. 한참을 싱크대 앞에 서서 물을 끓여 10L 넘는 뜨거운 물을 들이붓고 나니 물이 잘 내려간다. 또 하나의 일상의 문제 해결 완료.


이후 오전에 미뤄둔 일을 좀 한다. 가계에 보탬이 되려면 돈은 벌어야 한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4시가 넘었다. 하루가 왜 이리 빠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곧 있으면 그녀가 올 시간이다.


“아무래도 2차를 해야겠구만.”

주부는 불금도 하루 두 번이 가능하다.


그녀와 마실 화이트 와인 한 병은 이미 자양구판장에서 구매해 두었다. 내 취향인 호주 쇼비농 블랑을 그녀도 좋아하게 되어 기쁘다.


저녁 메뉴로는 오아시스마켓에서 새벽 배송으로 받아 냉장실에서 알맞게 숙성(?) 중인 광어회, 연어회가 있다. 요새 광어회 횟집에서 돈 아까워서 못 먹겠다. 잘 포장되어 제품화된 회 퀄리티가 너무 좋다. 최근 뉴스에서도 HACCP 공장에서 위생적으로 손질되는 모습을 본 터라 더욱 신뢰할 수 있어 안심이 된다.


마지막으로 올해 개발한 신메뉴 ‘들기름명란파스타’도 요리 할 계획이다. 시골에서 엄마아빠가 귀촌해 취미농사를 짓는 덕에 질 좋은 국산 들기름과 들깨를 사치스럽게 남발하며 쓸 수 있다. 고소한 들기름향에 톡톡 씹히는 통들깨, 그리고 짭조름한 명란이 어우러져 통밀파스타와 꽤나 잘 어울린다. 올해 버킷리스트 중 ‘10개 신메뉴 개발’ 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제 곧 그녀가 올 시간이다. 연락이 온다. 마중을 나간다.


한 남자 주부의 금요일, 제대로 불이 붙어버린 장작은 꺼지지 않고 계속 불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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