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하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커가면서 엄마한테 거짓말하고 놀러 다녔던 일들이 생각난다. 엄마는 한없이 준 것 같은데 나는 항상 부족하다. 나도 엄마한테 말 잘 듣는 딸이 되고 싶었다. 지금 내 마음이 많이 아픈 걸 보니 그러지 못했나 보다. 나 혼자 큰 것 같고 나 혼자 잘한 것 같았다. 내 뒤엔 항상 엄마의 힘이 있다는 걸 잊고 산다.
‘따르릉’ 엄마와 같이 사는 동생이다. “누나 엄마가 쓰러졌어” 가슴은 벌렁 벌렁대고 머리는 하얘졌다. 응급실에 갔을 때 뇌 쪽 소혈관이 터져 뇌출혈로 판정받았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오가던 엄마였다. 치매와 몸 왼쪽으로 약간의 마비가 왔다. 말하자면 풍이다. 엄마를 치료할 건 없다. “이제 퇴원을 하셔도 됩니다” 반갑지가 않았다. 병원에선 간병인을 썼다. 이제는 우리가 돌봐 드려야 한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운동과 정신력으로 이겨내야 한다. 엄마가 퇴원하실 때 몸무게가 25kg 치매가 먹는 인지도 잃어버리셨다. 넘기는 걸 못하셔서 스프와 밥물로 연명을 하셨다.
집으로 오시면서 우리 형제들은 교대로 자기 시간을 쪼개어 출근하듯이 엄마를 돌봐야 했다. 직장 다니는 나는 쉬는 날 내 일과 가족을 뒤로하고 엄마를 돌봐야 했다. 형제들이 지쳐 갈 때쯤 노인성 4등급을 받았고 엄마의 몸무게는 36kg이 되었다. 붙잡고 걷는 것도 점점 좋아지셨다. 우리는 엄마를 양로원으로 모시기로 했다.
“엄마가 적응하는 동안은 면회를 자주 오지 마세요”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엄마는 가라고 손짓하고 눈물을 홈치신다. 그래도 조금씩 움직이면서 대소변을 가리시던 엄마는 양로원에 있으면서 모든 걸 포기하듯 기저귀를 의지하며 지내고 계셨다. 간병인 한 분이 7명을 케어하다 보니 개인의 보호는 받을 수가 없다. 가족이 보고 싶거나 꿈을 꾸는 날이면 집에 가야 한다고 난동을 부린다. 엄마 생각에 양로원은 살아서 못 나가는 곳이라고 생각을 하신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이 힘들 까 봐 참고 계시는 것 같다. 그저 자식들이 편안하기를 바랄 뿐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나는 휴무 때, 동생들은 시간이 나는 대로 서로 겹치지 않게 면회를 간다. 코로나로 면회 시간은 1시간이다. 얼굴만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마음에는 서로의 미안함과 어쩔 도리가 없음을 알기에 뒤돌아 눈물을 흘릴 뿐이다. “엄마 미안해” 헤어질 때 마음이 아팠다. 보다 못한 막내 여동생이 집으로 모셔왔다. 딸들이 돌아가며 모셨다. 지금은 정년을 한 내가 모시고 있다. 집에서 가까운 주간보호센터에 가신다. 아침에 가셔서 저녁까지 먹고 오신다. 이렇게라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어 좋았다. 내가 일이 있어 일찍 나갈 때면 엄마를 일찍 보내야 한다. 하루 종일 계셔야 하는데 마음은 불편하고 엄마를 차에 태워 보낼 때면 “엄마 미안해” 하며 발걸음이 안 떨어진다. 엄마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우는 나를 붙잡고 우신다.
일주일에 한두 번 엄마의 치매는 소리 지르고 욕을 하신다.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하며 우신다. “엄마 왜 울어””내가 집에도 못 가고 딸 집에서 이게 뭐냐” 며 데려다 달라고 소리소리 지르고 욕하고 난리 칠 때면 내가 힘이 들었다. 처음에는 기억도 못하시는 엄마한테 소리 지르고 대들었다. 다음날이면 기억을 못 하신다. 이렇게 치매 증상이란 걸 알고 나니 엄마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잔다. 아침이면 “주간보호센터에 가셔야지” 하면 “노치원”하며 얼굴이 밝아져 즐거운 마음으로 가신다.
한 달이 멀다 하게 치매가 진행이 빠른 것 같다. 주간보호센터에서 저녁을 드시고 오셨다. 잠자리에 들려고 하자 “밥 먹었어?”하신다. “먹었지 왜 엄마 배고파” “나는 밥도 안 주고 너희들끼리 먹었어” 밥타령을 하신다. 직장 선배 언니들이 얘기할 때는 내 일은 아니겠지 했는데 내가 겪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기억력이 떨어져 가족을 못 알아보면 어쩌나 걱정이다. 엄마는 정말 배가 고프신 걸까? 아니면 정이 그리워서일까?